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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큐 May 29. 2024

오페라글라스와 ASML

메라 카사트 'In the loge'

관람석에서 오페라글라스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그린 '로지에서(in the loge)는 미국의 여류 화가 메리 카사의 작품이다. 로지(loge)는 오페라 극장 등에서 볼 수 있는 칸막이가 있는 관람석을 말한다. 메리 카사트는 미국 여성 중 처음으로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해 전시한 인물이며, 아예 프랑스로 건너가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뚫고 화가의 꿈을 키웠고 당시 여성 예술인들을 무시하는 시대 분위기와도 당당히 맞섰다. 그녀의 그림은 그래서 여성이 주제며 여성의 삶을 다각도로 그려낸 게 많다. 특히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오페라글라스와 두 개의 시선

메리 카사트 'in the loge'

 '로지에서'라는 작품에는 두 개의 엇갈린 시선이 있다. 하나는 그림의 주인공인 여성이 오페라글라스를 통해 바라보는 시선이다. 무대가 아닌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시선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페라글라스에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 그림의 중심인 건 확실하다. 또 하나의 시선은 이런 그녀를 바라보는 한 남성의 시선이다. 이 남성 역시 오페라글라스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꽤 노골적이다. 메리 카사트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인 오페라 하우스를 택해 엇갈린 두 시선을 그림 속에 녹였다. 노골적 남성의 시선을 무시하고 당당히 자신이 보고 싶은 곳을 응시하는 여성의 모습은 그녀가 매우 독립적 인물임을 의미하며, 한발 더 나아가면 자유를 갈망하기 시작한 당시 여성들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란 해석을 낳는다.  

 


오빠의 유명세 눌렸던 그녀의 꿈

메리 카사트는 주식 중개인 아버지와 은행가 집안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엄청난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녀의 큰 오빠는 꽤 유명한 인물이다. 미국 운송 역사에 큰 이정표를 쓴 펜실베이니아 레일로드의 7대 사장인 알렉산더 존스턴 카사트가 그녀의 오빠다. 그는 뉴욕의 맨해튼과 롱아일랜드를 허든슨강 밑으로 연결한 이스트 리버 터널을 계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며, 그가 재임하는 기간 펜실베이니아 레일로드는 외형이 두배 이상 성장했다. 그녀의 이런 집안 환경은 화가가 되려는 그녀의 꿈을 막아선 큰 장벽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여성의 사회진출 더구나 여성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카사트는 꿈을 끝내 이뤘고 당시 전 세계 화단의 주류였던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과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재밌는 건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카사트가 인상파 화가들의 미국 전시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 현재 미국의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이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데도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19세기 초 많은 미국의 미술 수집가들은 메리 카사트를 고문으로 위촉하고 싶어 했고 그녀가 고문으로 활동하며 이들이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 작품을 사들이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의 고문 수락 조건은 그들이 구매한 미술품 중 일부를 미국 미술관에 기부하는 것이었다. 이때 사들인 그림들의 상당수가 현재 뉴욕 MOMA(현대미술관) 등의 주요 전시 작품으로 남아있다.  


더 뚜렷하고 자세히 보고 싶은 욕망

Paolo Morigia 초상화

오페라글라스는 결국 더 크고 자세히 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보조해 준 도구이다. 렌즈가 그림에 등장한 것은 1352년 이탈리아 화가 토마소 다 모데나가 그린 위고 대주교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는 위고 대주교가 안경을 쓰고 책을 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후 200여 년이 흐른 1590년대 이탈리아의 화가 페데 길리지아가 그린 '파올로 모리지아(예수회 총장)'의 초상화에도 안경을 손에 쥔 모습이 보인다. 인간이 렌즈를 활용한 역사적 기록은 그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중국의 판관들이 연수정으로 만든 검은 안경을 썼다는 기록도 있고, 로마의 네로황제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에메랄드를 활용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본격적인 렌즈의 활용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함께하는데, 14세기 인쇄술을 활용해 작은 글씨의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며 이 작은 글씨를 더 선명하게 보고자 했던 사람들이 렌즈를 활용했고 결국 안경으로 이어졌다. 


망원경 그리고 ASML

망원경을 발명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안경 제조공이었던 한스 리페르 헤이(Hans Lippershey)이다. 그는 우연히 어린이들이 렌즈 두 개를 가지고 놀며 물체가 크게 보인다는 말을 하는 걸 듣고 망원경을 만들었다고 한다. 메리 카사트의 그림에 등장한 오페라글라스를 만든 것도 바로 한스 리페르 헤이였다. 망원경은 초기 군사용으로 주로 쓰였다. 이후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인간의 관심 영역은 지구를 넘어설 수 있었다. 더 작은 걸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호기심은 망원경을 현미경으로 발전시켰고 이는 인류의 과학과 의학 발달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현대 사회에 들어 작은 걸 확대하는 망원경의 원리는 역으로 이용돼 최첨단 산업을 빛내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반도체 제조 핵심 공정 중 하나인 포토 공정인데, 이 공정의 핵심 장비 중 하나가 ASML이라는 회사가 만드는 노광장비이다. 이 회사의 장비가 없으며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멈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요한 회사인데, 이 회사는 네덜란드에 있다. 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한 인물이 네덜란드 사람이라는 걸 떠올려 보면 참 재밌는 우연이다.   


더 작고 세밀하게 그려야 하는 첨단 반도체

반도체 포토공정

반도체가 특별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그 특성에 맞는 회로를 웨이퍼에 그려 넣어야 한다. 초기 반도체는 사람의 손으로 이걸 직접 그려 넣었다. 그러다 보니 일관된 성능 보장이 힘들었고 대량생산도 불가능했다. 성능은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지만 수작업에 가까웠으니 가격도 비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했던 초기 반도체 개발자들이 활용한 기술이 망원경과 사진의 원리이다. 망원경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자신이 그리고 싶은 회로도만 빛이 통과하도록 음각한 가림막(마스크)을 올린다. 빛을 쪼이면 음각으로 그려진 회로가 작은 그림으로 나타난다. 그곳에 빛에 반응하는 물질(감광액)을 발라 놓으면 회로도가 그려진다. 이런 방식으로 웨이퍼에 복잡한 반도체 회로를 그려 넣고 다양한 화학 약품과 반응을 활용해 홈을 파고 씻어내는 거다. 이런 과정들을 사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포토, 화학약품으로 녹이고 홈을 판다 하여 식각 또 이렇게 그려진 회로도에 전기가 통하고 연결되도록 고정한다 해서 증착이라고 부르고 있다. 


미-일 분쟁이 기회가 된 ASML

198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폭풍 성장 시기 소니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전자산업은 미국에 굉장한 위협이었다. 마치 요즘 중국을 견제하듯 미국은 일본을 견제했다. 심지어 엔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일본 상품의 가격을 비싸게 만든 프라자 합의가 나온 것도 이 시절이다. 반도체 산업도 마찬가지였는데 미국의 일본 반도체 산업 견제의 수혜를 본 대표적인 나라는 한국이다. 삼성의 반도체 시장 진출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의 ASML 역시 이 시기 미국의 일본 견제 반사익을 챙긴 기업이다. 반도체 노광장비 기술은 미국의 코닥은 물론 일본의 니콘과 캐논 같은 카메라와 관련된 기업들이 주도하던 시장이다. 하지만 미국의 일본 반도체 산업에 대한 강한 견제로 일본의 반도체 시장이 침체되며 니콘과 캐논이 이 사업을 포기한다. 미국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차원에서 장비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 설계에 집중했고 노광장비 핵심 기술들은 이때 해외로 이전된다. 특히 미세공정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욱 주목받는 극자외선 활용 기술은 미국의 인텔이 가지고 있었는데, ASML로 넘겨줬다.



그림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in-the-loge/tgF6xIFz0Qjp1w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portrait-of-paolo-morigia-0125/EwEqqMC453ro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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