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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an 17. 2019

출근길 로맨스

돌멩이는 아무런 힘이 없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걸어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보며 생각했다. 돌멩이도 아니고 사실은 거의 돌멩이 조각에 가까운 아주 작은 것이라 발에 닿았다는 감촉조차 느껴지지도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남산을 바라보았다. 산이라기엔 야트막해서 그냥 언덕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우스운 생각을 해봤다. 이래 봬도 정상까지 오르려면 꽤나 힘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 정상에 우뚝 솟은 남산 타워, 뭐라더라 서울 N 타워라고 이름이 바뀌었댔나? 그래도 나에게는 영원히 남산 타워라는 이름일 것이다.

아침 출근길이라 남산 주변이 어슴푸레 밝고, 남산 타워의 조명은 채 꺼지지 않았다.

그때 별안간, 남산 타워 꼭대기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하늘에서 환하고 밝은, 그리고 굉장히 커다란 불빛이 번쩍, 생겨났다. 노랗고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빛덩어리는 마치 태양이 지구 표면으로 얼굴을 내민 것 같이 밝고 뜨거웠다. 아직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겨울일 텐데, 빛덩어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열기만으로 금세 후끈해졌다. 그리고 그 빛덩어리는, 아니 불덩어리는 남산 타워를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성인가? 아니 이건 유성이 아니라 운석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뜬금없이 웬 운석이야, 이게 대체. 오늘 뉴스에서 운석 얘길 했던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서울 남산 하늘에 운석이 떨어지는 중이라고?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날들 중 하나였을 뿐인데,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목요일 아침의 분주한 출근길이었는데, 내 눈 앞에서 지구의 멸망이, 그러니까 적어도 서울의 멸망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몇 분간 멍하니 남산 타워 꼭대기로 돌진하는 운석을 바라보았고, 무언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야 비로소 등을 돌려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 애쓰기 시작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얼핏 보인 것 같기도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이 놈의 두 다리는 왜 이렇게 무거워져서 내 말을 듣지 않는지, 누가 발목을 잡고 땅바닥으로 잡아끌기라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고개를 돌려 운석의 위치를 확인했을 때, 이 커다란 우주 돌멩이는 남산 타워를 절반 이상 녹여버리고 남산 정상에 머리를 박으려는 중이었다. 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는 내 숨을 멎게 했고, 강렬한 불빛은 내 눈을 멀게 했다. 안간힘을 써서 다리를 움직이는데, 아까 발에 채였던 작은 돌멩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돌멩이는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내 발에 채여 어디론가 굴러가면 분명 그만큼의 힘을 갖게 된다.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힘차게 땅으로 돌진하는 저 운석과 같이.

아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꽈앙, 하는 굉음이 들리고 눈앞은 순식간에 밝아졌다가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다.


헉, 하고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깬다. 그래, 꿈이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뒤늦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시간과 날짜를 확인한다. 2019년 1월 17일 목요일. 아직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나는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한다.

잠이 덜 깬 탓인지 실감 나는 꿈 탓인지 정신이 멍하지만 우선은 씻어야 한다. 그래야 잠도 달아날 테니까. 비몽사몽에 양치를 하고 샤워를 마치고,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최대한 오래 침대에 머물기 위해 택한 방법은 전날 저녁 잠들기 전에 웬만한 준비를 모두 마쳐두는 것이다. 이 덕분에 7시에 일어나도 7시 20분이면 집에서 나올 수 있다.

길지 않은 거리를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운이 좋은 날엔 수분 내로 도착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눈 앞에서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스쳐 지나갈 때다. 좀 더 빨리 걷거나 뛰었어야 했다고 자책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다.

버스에 오르면 늘 앉는 자리가 있다. 보통 버스는 텅 비어 있거나 한두 명이 앉아 있는 게 전부라, 내가 앉을자리는 항상 비어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같아 반갑기까지 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한다. 습관처럼 게임을 잠깐 해서 손가락 근육을 풀어주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brunch'라는 어플을 켠다. 스크롤을 오르내리며 활자들을 훑어보다가 이내 글쓰기 버튼을 누른다. 내 머릿속처럼 새하얀 백지가, 아니 '새하얀'과 백지의 '백'은 의미 중복이니까, 그리고 이건 종이도 아니고, 그냥 하얀 화면이 떠오른다는 말로 표현을 하자. 그러니까 오늘은 이 문장을 시작해 봐야겠다.


돌멩이는 아무런 힘이 없다.


지난밤의 꿈을 떠올린다. 꿈이 내 상상력의 원천이긴 하지만, 모든 꿈을 글로 쓸 수는 없다. 30분 남짓 버스 안에 앉아있는 동안에 내가 무언갈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 아날로그 글쟁이라 공책에 연필로 먼저 날린 듯 글을 쓴 후에 디지털로 옮기는 작업이 더 익숙하다. 그리고 왠지 그쪽이 더 잘 써지는 것 같고.

그래서 나에게 휴대폰으로 장문의 글을 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버스 안에서는 그 좋아하던 책 읽기를 비롯한 활자 읽기를 할 수가 없다. 비루한 균형감각은 멀미를 재능처럼 끼워 넣어 주었다. 결국 슬프게도 10분에서 15분 남짓이 내가 버스 안에서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시간이다. 타이머에 맞춰두기라도 한 듯, 이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재빠르게 글을 쓴 다음에는 잠시 눈을 감거나 창밖 먼 풍경을 아련하게 바라봐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혹은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그렇게 길지 않은 글을 써 내려간다. A4로 반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어제 썼던 이야기와도 (아니 이전에 썼던 그 어떤 글과도) 연결되지 않을뿐더러, 기승전결도 없는 글이 된다. 장편소설의 한 귀퉁이를 조각내서 얹어놓은 것 같은데, 조각 케이크처럼 맛있는 글이 아닐 때가 많다. 그러니까, 미완성의 단편소설 조각이 완성된다.

글쓰기를 내 평생의 업으로 삼는다는 생각까지 해 봤다. 언젠가는 글을 써서 먹고살고 싶다고 꿈을 꾼다. 매일 이렇게 차곡차곡 모아두면, 언젠가는 높은 산이 되어서 나도 그곳에 나만의 타워를 건설할 수 있겠지.

돌멩이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누군가의 발에 채여 굴러갈 수 있는 돌멩이는 어느 정도는 힘을 가진다. 겨우 구르는 정도의 힘이지만 자신이 있던 곳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도의 힘은 된다. 일상이 된 출근길 글쓰기는 지금이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내 손가락에 채여 조금씩 구르다가 운석처럼 어딘가에 충돌할 날이 있을 거다.

몇 글자 더 쓰려고 손가락을 움직여보다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서, 결국 또 어중간하게 마무리를 한 다음 발행 버튼을 누른다. 버스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다른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조금 걸어야 하는데 그 짧은 길에 남산과 남산 타워를 볼 수 있다. 지난밤 꿈을 생각하며, 그래도 하루 정도는 지구의 멸망이 늦어지기를 바라본다. 내가 출근길의 글쓰기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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