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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각 Oct 24. 2021

누구나 막내에서 시작한다

배우기 위한 바른자세

드라마에 명장면이 존재하듯 일상에도 기억하고 싶은 또렷한 순간이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선명한 기억의 자국을 남긴다. 막내 1년차일 때 현장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평소 출근시간보다 이른 아침, 현장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타 부서 선배들이 로비에서 나눈 짧은 대화는 막내 생활에 지쳐가고 있던 나에게 단비 같은 장면이었다.


A: B대리 오늘 행사하는데 기물 챙겼지?

B: 아니요 안 가져왔는데요.

A: 오늘 행사하는데 챙겨 놓지 않으면 어떻게?

B: 필요하다고 말씀 안 하셨는데. 지금이라도 알아볼까요?

A: 아니야. 다른 기물로 대체해야지.


현장지원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무거운 기물을 나르며 힘을 썼는지 몹시 피곤했다. 지하철 빈좌석이 생기자마자 몸을 욱여넣고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에서는 아침에 스쳐 지나갔던 대화가 어른거렸다. 내가 B였다면 기물을 준비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며 죄송하다고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둔탁한 물건으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고 쏟아지던 졸음이 달아났던 경험이 있다. 


뻣뻣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자발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다시 그 상황을 복기해보면 나 스스로가 죄송함을 느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을 부여잡고 한 밤중에 이불을 차거나 잠가 놓았던 인내심의 뚜껑이 나도 모르게 열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선배가 미리 알려주셔야죠?” 라고 말하는 대리의 당당한 태도에서 당당함을 넘어 탄산음료에서나 맛볼 수 있는 시원한 청량함이 느껴진다. 다시 곱씹어봐도 맞는 말이었다.


가족 구성원은 집집마다 다르다. 그러나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사람은 모두 막내에서 시작한다. 일을 배워야 하는 입장이기에 막내는 항상 아쉬운 위치다. 선배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기본이고 업무의 비효율을 몸소 감내해야 한다.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선 기존의 시스템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 걸어 놓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인내의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인내를 감수한다는 뜻이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때 깨달았다. 


배우는 자세와 저자세는 엄연히 다른 자세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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