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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각 Oct 24. 2021

나의 지름길을 찾는 중입니다

엑셀에 민트색을 칠했습니다

초행길은 낯설다. 처음 보는 지형지물을 익히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자주 발걸음을 옮겨보고 주변의 모습을 눈에 담아봐야 길이 익숙해진다. 그런 노력을 반복하다 보면 초행길에서 지름길을 발견하는 안목이 생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고 하는데 아직 눈은 손바닥 만한 작은 나뭇잎에 머물러 있다. 


엑셀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나에게 초행길이었다. 주요 업무는 월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보고서는 정량적인 정보와 정성적인 정보를 누가 봐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자료다. 엑셀은 주로 수치를 다루는 도구인데 어떻게 활용하든 정확한 숫자를 보고서에 보여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는 요리의 조리 과정이 복잡하든 간단하든 결국 소비자가 원하는 최상의 맛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고서에 기재할 숫자를 도출하기 위해 엑셀자료로 만든다. 자료를 만드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엑셀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따라서 작업자 이외의 사람이 엑셀 데이터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주로 정량적인 내용은 사수가 담당했는데 당연히도 선배는 본인의 취향을 엑셀에 반영했다.


시간이 흘러 선배는 타 부서로 이동했고 자연스럽게 수치를 다루는 일을 내가 담당했다. 선배의 작업방식을 사용하면 보고서를 만드는데 3일이 필요했다. 내가 나뭇잎에서 숲을 볼 줄 아는 시야를 가졌을 때 나만의 지름길을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이 뾰족한 모양의 죽순처럼 엑셀 위로 돋아났다. 내 입장에서는 3일이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 2가지 기준을 세워 업무를 개선했다.


<첫번째 기준: 직관적인 디자인>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엑셀자료를 직관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타인이 만든 자료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을 사용한다면 이는 분명 비효율적이다. 왜냐하면 보고서를 작성하고 검토하는데 사용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전자제품을 바로 사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친절한 메뉴얼처럼 이해에 불필요한 요소를 대폭 줄였다. 보고서에 들어가는 페이지 순서에 따라 엑셀을 하나의 파일로 압축하여 구성하니 최소한의 동작만을 입력하면 충분했다. 덕분에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투입하던 평소의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었다.


<두번째 기준: 시그니처 디자인>

왼손이 한 일을 오른발도 알게 하기 위해 “저 친구가 작업하면 뭔가 좀 달라”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대놓고 들어내지 않아도 존재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BMW의 그릴은 키드니 그릴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로고를 가려도 BMW임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자동차의 그릴이 시그니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도 키드니 그릴처럼 “내가 했어요 외치지 않아도” 자신만의 개성을 업무에 녹여내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회색을 주로 사용하는 엑셀에 민트색을 칠했다. 민트색을 좋아했고 엑셀에 막상 사용하니 잘 어울렸다. 민트색 덕분에 눈여겨볼 수치 정보가 눈에 잘 들어왔고 무엇보다 엑셀의 디자인이 예뻐졌다. 덕분에 딱딱하기만 한 업무가 한결 수월 해졌다. 시간이 지나 엑셀에 민트색을 보면 선배가 생각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만의 시그니처를 완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름길을 찾기 위해서는 지름길의 짧은 길이보다 더 많은 거리를 거닐어야 한다. 

낯선 환경에 들어서면 괜히 주눅이 든다. 그러나 일단 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번 해보면 가슴을 답답하게 하던 위압감도 한층 가볍게 느껴진다. 피할 수 없는 업무가 앞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면 서투름을 인정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다시 반복하는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 


나무에서 숲을 볼 수 있다면 이제는 숲에서 길을 과감하게 잃어야 할 시간이다. 나무가 촘촘하게 들어찬 숲에서 누구든지 헤매겠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발견한다. 나 또한 내가 만든 길의 끝에서 3일 걸리던 일을 3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숲에서 나오고 나니 질문 하나가 머리를 내민다.


“누군가는 3시간을 더 짧은 시간으로 단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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