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석 Nov 23. 2020

죽음 앞에 의연했던 장수 김응하의 전투 기록화

조선 광해군 때인 1618년, 여러 여진 부족을 아울러 막강한 세력을 키운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가 요동 지방을 치며 명나라에 선전포고합니다. 다급해진 명나라는 10만 대군을 보내 일대 결전을 준비하고, 조선에도 파병을 공식 요청하죠. 명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조선은 강홍립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로 1만 명이 넘는 대군을 보냅니다.     


드디어 찾아온 결전의 날. 1619년 3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중국 만주 땅 부차(富車)에서 후금 군대와 격돌합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수많은 조선 병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좌영장(左營將)으로 출전한 김응하(金應河, 1580~1619)도 장렬하게 맞서 싸우다 최후를 맞습니다. 도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 주력 부대는 후금군에게 투항하죠.     


이 이야기는 수많은 기록으로 전해집니다. 그 가운데는 소설도 제법 남아 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1630년에 권칙(權侙, 1599∼1667)이란 문인이 지은 한문소설 <강로전(姜虜傳)>입니다. 강(姜)은 강홍립, 로(虜)는 오랑캐이니 ‘강 씨 오랑캐’라는 조롱의 의미로 붙인 제목입니다. 당연히 내용도 적군에게 투항한 강홍립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죠. 반면에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김응하 장군은 절개를 지킨 인물로 높이 평가합니다. 소설에서 훗날 고향으로 돌아온 강홍립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다.     


어느 날 충렬록이란 책을 가져와 보여주는 이가 있었다. (책에 삽입된 그림을 보니김응하는 홀로 혈전을 벌이다 힘이 다하자 절개를 지켜 죽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반면 강홍립과 김경서는 무릎을 꿇고 오랑캐 장수 앞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었고 그 곁에는 갑옷과 무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그 모습이 마치 눈앞의 장면처럼 또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1621년에 훈련도감이 펴낸 『충렬록(忠烈錄)』


패배한 전투를 왜 그림으로 남겼을까. 더구나 우리 땅에서 벌어진 전투도 아닌데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교 국가 조선이 김응하의 죽음을 우국충절(憂國忠節)의 표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김응하 추모 사업과 그 후손에 대한 배려는 광해군 시기부터 고종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김응하 추모 사업의 첫 성과물이라 할 것이 바로 위의 인용문에 소개된 『충렬록』의 간행이었죠.     



1621년에 훈련도감이 펴낸 『충렬록(忠烈錄)』에는 김응하의 전기, 김응하를 애도하는 여러 문사의 시와 글 외에 그림 10점이 실려 있습니다. 그 뒤로 170여 년이 지나 1798년, 당시 임금이던 정조의 명에 따라 『충렬록』이 한 차례 더 간행됩니다. 물론 두 책은 내용 면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고, 특히 그림은 새로 제작됐습니다. 여기에는 그림 9점이 실렸습니다.     


진을 펼쳐 적을 맞는 장면을 그린 <파진대적도(擺陳對敵圖>


1621년 간행본과 1798년 간행본 모두 첫 번째 그림은 김응하의 초상입니다. 그다음에 차례로 등장하는 전쟁 기록화는 1798년 간행본에 수록된 것을 위주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첫 번째 그림은 <파진대적도(擺陳對敵圖>. 진을 펼쳐 적에 맞서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책의 양면으로 나뉘어 그려진 두 그림이 한 장면을 이루고 있죠. 오른쪽에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룬 조선군 뒤로 말을 탄 장수가 바로 김응하입니다. 반면 왼쪽의 적군은 상대적으로 묘사된 분량 자체가 적어 대조를 이룹니다.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그린 <원와독전도(援枙督戰圖)>


두 번째 장면은 <원와독전도(援枙督戰圖)>.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1621년 간행본에는 없는 그림입니다. 오른쪽의 조선군이 화포와 활을 쏘고, 왼쪽에는 적군이 곳곳에 쓰러져 있습니다. 치열했던 전투 장면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그림이죠. 활 쏘는 병사들 뒤에서 북을 치기 위해 북채를 쥔 두 팔을 한껏 치켜올린 인물이 바로 김응하입니다. 이 장면만 보면 당연히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군이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데다 하필 거센 모래바람까지 불어닥치는 바람에 전투는 패배로 끝나고 맙니다.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시진검격도(矢盡劒擊圖)>


다음 장면은 <시진검격도(矢盡劒擊圖)>.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들고 싸우는 모습입니다. 한눈에 봐도 패배의 기운이 완연합니다. 몇 안 남은 조선 병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싸우는 모습이죠. 김응하 역시 갑옷을 입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최후까지 용맹하게 저항합니다. 김응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이미 몸에 화살 네 대가 꽂혀 있는 게 보이죠. 전투 장면을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조선 시대 그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1621년 간행본에 수록된 그림에 묘사된 김응하의 시신


강홍립과 김경서가 적에게 투항하는 마지막 그림은 굳이 여기에는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1621년 간행본에 수록된 그림 가운데는 김응하가 칼을 쥔 채 쓰러져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도 있습니다. 죽음을 묘사하는 데 인색했던 조선 시대 회화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 장면이야말로 죽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결정적인 장면의 하나일 겁니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도 이 그림을 보고 깊이 감동해 <제김영장심하사적도(題金營將深河射敵圖)>라는 시를 남겼죠. 그 가운데 한 대목을 읽어봅니다.     


五營塵色低不起    오영 먼지 가라앉아 일어나지 아니하고 

鐵騎齊飮深河水    철기들은 일제히 심하의 물만 마시네 

上將投降三士從    상장이 투항하자 세 사람이 뒤따르고 

塞天漠漠君獨死    아스라한 변방 하늘 당신 홀로 죽어갔네     


제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한 논문 <심하전투의 명장 김응하와 『충렬록』 판화>(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1)의 저자 유미나 원광대 교수는 1798년 간행본 그림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소밀(疏密)의 변화감을 살리고, 서양화의 원근법을 수용하여 탄탄한 구조와 긴장감이 살아있는 화면을 이루어내었다. 다양한 자세와 무기를 들고 전투에 임하는 인물들을 역동감 있게 묘사한 전투 장면은 전쟁 기록화에서 신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미술과 달리 전쟁을 기록한 그림이 희귀할 정도로 적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늘 품어왔죠. 그러던 와중에 전쟁과 관련한 우리 소설들을 모은 책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돌베개, 2007)을 읽게 됐고, 이 책에 수록된 <강로전>에서 『충렬록』과 김응하 장군, 그리고 그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실렸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평범한 것에서 찾아낸 비범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