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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an 15. 2021

별이 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의 유배도

7월 8[계묘]에 왜놈들이 최익현을 잡아다 대마도에 가두었다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사령부에 갇힌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저항하며 굽히지 않자왜놈들이 마침내 등급을 나누어 형을 정했다. (최익현과 임병찬 함께 대마도 위수영으로 유배했다문인 자제와 고관 유생 삼십여 명이 배웅하면서 통곡하다 실성하자 최익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소거듭 폐를 끼치고도 죽지 못한 것이 부끄럽소.” 그러고는 흔연히 수레에 올라타고 떠났다최익현의 아들 최영조와 임병찬의 아들 임응철이 부산항까지 따라갔지만왜놈들이 칼을 휘두르며 쫓아 통곡하며 돌아왔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절명시(絶命詩) 네 수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黃玹, 1856~1910). 운명을 다해가는 조선의 마지막 날들을 적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을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갑니다. 제5권에 실린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4~1907)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면암과 매천은 참 다르면서도 닮아있다고. 누군가를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 불러도 좋다면, 바로 이분들이 아니겠느냐고.     


채용신 〈최익현 유배도〉, 1910~20년대, 비단에 채색, 91.5×54cm, 백제문화체험박물관


그 거룩한 삶과 죽음에 감복한 것은 물론 한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초상화가 석지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생전에 최익현 초상을 여러 차례 그려 남깁니다. 면암을 마음 깊이 존경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지 않았겠죠. 그만큼 생전에 면암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니, 면암의 죽음에 누구보다 비통했을 겁니다. 조선의 마지막 초상화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그 죽음을 기리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그림, 바로 〈최익현 유배도〉입니다.     


제가 아는 한 귀양 가는 모습을 그린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그림입니다. 병풍처럼 세로로 긴 그림 두 폭이 나란히 전하죠. 왼쪽은 최익현을 인력거에 태워 숭례문을 나와 서울역으로 데려가는 장면, 오른쪽은 부산 초량역에서 내려 부산항에서 배에 태우는 장면입니다. 매천은 사람들이 “배웅하면서 통곡하다 실성”하기도 했지만, 정작 면암은 “흔연히 수레에 올라타고 떠났다.”라고 적었습니다.     



왼쪽 그림을 자세히 봅니다. 당시 서울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찻길이 보이고, 화면 한가운데 인력거에 탄 면암의 모습이 보이죠. 옆에 면암선생(勉庵先生)이라고 한자로 적어놓았군요. 일본 순사가 인력거 뒤를 따릅니다.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선비. 위정척사파의 중심인물. 게다가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까지 일으켰죠. 일제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이번엔 오른쪽 그림입니다. 면암은 기차로 부산 초량역에 도착한 뒤 부산항에서 대마도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역시 화면 한가운데 선착장에서 막 배에 오르려는 최익현의 모습이 보이죠. 뒤에 선 인물은 맨 위에 인용한 《매천야록》의 기록에 보이는 임병찬입니다. 어쩌면 이 장면을 그리기에 앞서 채용신이 《매천야록》을 읽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채용신 〈최익현 초상〉, 1925년, 비단에 채색, 101.4×52cm, 국립현대미술관


11월 17[경술]에 전 판서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었다처음 최익현이 도착했을 때 그에게 왜국 곡식으로 만든 죽을 주었는데물리치고 먹지 않았다왜놈들이 매우 놀라 우리 정부와 통하여 음식을 제공했다임병찬 등이 다시 강권했지만나이가 많고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먹는 것이 차츰 줄더니 곱사병까지 겹쳤다. 10월 16일에 자리에 눕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이날 서쪽을 향해 머리를 숙인 뒤 임병찬에게 구두로 마지막 상소를 남겼다살아 돌아가 임금에게 전해 달라고 하고 죽으니그의 나이 74세였다왜놈들도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줄지어 조문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조차 감복해 조문했다고 매천은 적었습니다. 이후 면암의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이어지는 기록입니다.     


21일 영구가 부산에 이르자 우리 장사꾼들이 시전을 거두고 통곡했는데마치 친척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남녀노소가 모두 뱃전을 잡고 엎어지며 슬피 우니곡성이 넓은 바다를 뒤흔들었다장사꾼들은 자신들의 시전에다 호상소를 마련하고 상여를 꾸몄다하루를 머문 뒤에 떠나자 상여를 따라오며 미친 듯 우는 자가 수천수만이었다승려기생거지에 이르기까지 부의를 들고 와 인산인해를 이루니 저자 바닥 같았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나라의 백성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면암의 죽음을 계기로 뜨겁게 분출했음을 짐작게 합니다. 매천은 이 기록을 꽤 길고 자세하게 적었습니다.     


동래에서 떠나던 날에는 상여가 몇 차례나 움직이지 못했는데왜놈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변이 날까 두려워했다이에 엄히 경비했지만사람들을 오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상주에 이르자 왜놈들도 곤란하게 여겨 상여를 기차에 싣고 눈 깜짝할 사이에 고향에 도착했다그러나 상주에 이르는 삼백 리에 이미 십 일이나 허비했다.     


당시 일본이 면암의 죽음이 불러올 파장에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정부는 뭘 했을까. 다음 대목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곡성이 온 나라 골목마다 퍼졌고사대부에서 길거리의 어린아이들과 심부름꾼들까지 모두 눈물을 뿌리며 면암이 돌아가셨다” 하면서 조문했다나라가 시작된 이래 사람이 죽었다고 이처럼 슬퍼한 적이 없었다그런데도 조정에서만은 은졸(隱卒임금이 죽은 공신에게 애도의 뜻을 표시하는 것)의 의전도 없었으니적신들이 나랏일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에는 이른바 적이나 다름없는 신하들만 남았을 뿐, 면암의 순국을 정작 조선 정부와 임금은 외면했다는 내용입니다. 희망이 없는 그 시절을 견디고 살아내야 했던 백성들의 눈물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매천은 면암의 죽음에 관한 이런 내용도 적어놓았습니다.   

  

최익현이 죽기 며칠 전날 밤에 서울 동쪽에서 커다란 별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이 보이더니 얼마 뒤 부음이 이르렀다영구가 동래항에 이르자 갑자기 대낮에 처량하게 비가 내리더니 바닷가에 쌍무지개가 생겼다장례를 치를 때는 큰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쳤으며소상과 대상 때도 궂은 비가 종일 내려 사람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슬퍼했다.     


큰 별이 지니 하늘도 울었다는 얘기. 면암의 죽음이었으니 그럴만하다 여겨집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갑니다. 〈최익현 유배도〉 가운데 오른쪽 그림을 크게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뱃머리에 걸려 나부끼는 저 깃발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명하지는 않지만, 가운데 둥근 원이 있고 네 모서리에 점이 찍혀 있죠. 그렇다면 답은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그대로입니다. 깃발의 위치도 아주 절묘합니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1910년에서 1920년 대로 추정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제아무리 면암의 유배도라 해도 당대 최고의 유명 화가였던 채용신이 대놓고 태극기를 그려 넣을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만, 추측은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다만, 저 깃발에 담긴 화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이 그림이 지닌 역사성과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이 그림을 2018년 말에서 2019년 초 사이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특별전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에 받은 놀라움과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죽음이 예정된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와 그의 마지막을 적어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또 다른 조선의 마지막 선비, 그리고 그 숭고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남긴 조선의 마지막 초상화가. 《매천야록》을 읽으면서, 그림이 실린 도록을 다시 꺼내 펼치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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