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㉒ 송인 개인전 <이념의 기록>
한 지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작가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작가의 내면을 할퀸 상처는 보이지 않는 타자의 상처를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예술가적 소명을 작가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념의 기록’이라는 제목 아래 송인 작가는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인권 침해와 전쟁으로 인한 자유주의 붕괴, 대량 학살과 도시 파괴, 여성과 아동에게 가해지는 폭력 등 시대적 현실을 직시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타인의 고통에 인색했던 것이 우리 미술의 현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기 예술의 가치와 지향점을 더 넓은 세계의 일상에서 찾으려는 작가의 시도는 소중하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가로 390cm에 이르는 대형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얼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다. 멀리 폐허로 변한 도시 위로 화염처럼 타오르는 하늘, 파괴된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끔찍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삶의 터전을 등진 이들은 작품 제목처럼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대열의 한 가운데서 글자 없는 푯말을 든 앙상한 손은 이들이 놓인 상황을 단적으로 웅변한다. 말할 수 없는 자의 고통. 작가가 이들에게 눈길을 준 까닭이다.
“2020년 아프가니스탄 난민사태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인간의 생명과 가치 존엄은 무너지고 거대 이념의 편린속에 수많은 목소리는 묻히게 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민주주의 파괴는 수많은 인명과 생존권을 앗아갔다. 그로 인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은 정치적 이념이라는 잣대에 처참히 짓밟히고 도시의 파괴와 가족의 해체를 가져왔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 곳곳의 아픔과 전쟁으로 인한 상흔의 깊은 상처를 내러티브를 통해 시대상을 반영하고 예술적 흔적으로 남기고자 한다.”
흑과 백으로 표현된 얼굴들. 미세한 주름과 선으로 이뤄진 작가만의 얼굴 표현은 수정테이프와 먹을 이용해 지우고 쌓는 과정을 반복하는 작가 고유의 방법이다. 작가는 캔버스 천이 아닌 장지에 먹과 아크릴, 콩테, 오일 파스텔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무겁게 가라앉는 톤으로 형상화한다.
절망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른들의 고통과 달리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이의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