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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r 05. 2024

태초의 회화로 귀환하다

[석기자미술관]㉘ 최상철 개인전 <귀환: DAWN OF TIME>

無物 C, 2005,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130.3cm


무수히 많은 검은 선이 화폭 위에서 만나고 얽혀든다. 흘러내리거나 날아오르거나 덩어리진 형상은 그 무엇의 재현도 아니다. 흡사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우주를 구성하는 미세한 물질들이 생성하고 운동하고 소멸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주 먼 옛날 인류가 처음으로 그린 그림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無物 12-10, 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130.3cm
無物 13-6, 2013,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5×112.1cm



최상철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도구는 붓이 아니다. 먼저 작고 동그란 고무 패킹을 캔버스에 던진다. 고무가 떨어진 그 지점이 바로 작업의 시작점이다. 달걀 모양의 돌에 검정 물감을 골고루 묻힌 뒤 그 시작점에 올려놓고 작가는 캔버스를 양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움직여 돌을 굴린다. 이 과정을 1천 번 넘게 되풀이한다.      



돌은 생긴 대로 구르며 흔적을 남긴다. 검정은 깊고 깊은 우주의 중심에서 길어 올린 것 같은 색이다.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무엇이 될지는 정작 작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므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소개된 최상철 작가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개인전 이력만 보면 이른바 주류 화단과 일정한 거리를 둬온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 초 기하 추상 대열에 합류하며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는 1980년대 들어 기존 화단의 흐름이나 유행에서 벗어나 다른 추상회화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무제 97-2, 1997,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130.3cm
무제 E, 1995, 캔버스에 아크릴릭, 72.5×60.5cm
PAINTING 114, 1992, 캔버스에 아크릴릭, 53×45.5cm
無物 01-35, 2001,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8×227.3cm


장식이나 기교를 지양하고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최상철의 작업은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맥을 같이한다. 그림 이전의 상태, 무물(無物)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처럼 일면 문명 비판적 의미도 담겼다. 하지만, 작업 방식이나 구현된 화면을 보면 결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無物 18-12,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5×112cm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하추상 전시에 맞춰 최상철 작가가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제작한 작품 21점과 드로잉 18점을 선보인다. 전시장 1층에 신작, 2층에 구작이 걸렸다. 미술기자 시절이었으면 틀림없이 건너뛰었을 전시를 처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그러면서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전시 정보

제목최상철 개인전 <귀환>

기간: 2024년 3월 30()까지

장소백아트 서울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74-13)

문의: 010-2174-2598     

#최상철 #개인전 #귀환 #추상회화 #미니멀리즘 #백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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