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살인. 6 (효라빠 장편소설)
한적한 골목의 가로등이 깜박거리더니 불이 나가 버렸다. 길 옆으로 주차되어 있는 몇 대의 자동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차도 대부분 버려진 차였다. 주택가와 많이 떨어져 있어 가로등이 꺼지자 바로 어두워졌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막고 있어 주변은 더 어두워 보였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발정기를 맞은 수컷 들고양이 떼가 암컷을 두고 싸우는 소리가 앙칼지게 들렸다.
멀리서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한 여고생이 걸어가고 있었다. 학생은 스마트폰 영상 보느라 그런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보통 학원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지만 버스가 고장 나 걸어갔다. 반대 편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두 손을 주머니 깊게 찔러 넣은 남자가 비틀 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술에 취해 보였다. 여고생이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부딪칠 것 같아 길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워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순간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느꼈다. 무서워졌다. 가슴이 뛰었다. 가방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 음악 소리도 심장 뛰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비틀 거리는 남자와 지나쳤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바람을 타고 여고생에게 날아왔다. 그녀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반대방향이 되었다. 낯선 남자를 지나쳤어도 여고생의 발걸음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바닥으로 향하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예뻐 보였다. 몇 걸음 떨어져 지나갔는데도 상큼한 로션 냄새는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알코올 냄새로 가득 차 있던 폐의 공기가 여고생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아래쪽에서 뭉클하면서 뭔가 자극이 왔다. 술기운 때문에 자극은 더 크게 올라왔다. 힘없이 축 쳐져있던 것이 빳빳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틀거리던 걸음이 멈췄다. 앞으로 움직이던 몸이 방향을 틀었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뺐다. 모자를 들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여고생을 바라봤다. 교복 입고 있는 모습이 순간 옷을 다 벗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긴 생머리 만이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던 남자가 뛰기 시작했다. 여고생이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지나쳤던 술 취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뛰었다. 남자는 더 빠르게 달렸다. 귀에 꽂혀있던 하얀색 블루투스 이어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봄날 세차게 내리는 봄비를 맞아떨어지는 벚꽃잎처럼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자와 거리가 가까워 지자 등에 메고 있던 가방까지 내팽개치고 뛰었다. 입에서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계속 나왔다. 도와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급하게 달리느라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억센 남자의 손이 여고생의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잡아챘다. 그녀가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씨발년아! 조용히 해"
"으악~ 아빠! 아빠!"
"입 닥쳐. 죽고 싶지 않으면"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여고생은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여전히 남자의 손에 그녀의 머리채가 잡혀 있었다.
"씨발!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살려주세요!"
"소리쳐도 소용없어.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
"아빠,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남자가 비명소리를 의식했는지 여고생의 입을 막고 버려진 차 사이로 질질 끌고 갔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엉엉엉"
"입 닥치고 조용히 하라고! 말 더럽게 안 듣네."
그녀의 비명 소리가 이제는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미친 듯이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남자는 무시했다.
'철석~ 철석~ 퍽! 퍽!'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자 남자가 여고생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남자의 억센 손이 계속해서 그녀의 빰과 머리를 때렸다. 그는 어린 여고생을 잡아먹어야 할 먹잇감으로 여겼다. 손으로 뺨을 가리면 머리를 때렸다. 매끄럽게 찰랑거리던 머리는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머리에서 나던 향긋한 샴푸 향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먼지에 묻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코에선 피가 흐르고 눈 주위가 서서히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입술도 터졌다. 코와 입술의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교복 셔츠의 단정하게 묶여있던 넥타이는 뜯어져 버린 단추와 함께 너풀거렸다.
"씨발년아 옷 벗어!"
"안 돼요."
남자가 계속 뺨을 때리며 소리쳤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줬다. 하얏고 작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무서워 아빠 생각이 났다. 누구라도 자기를 구해 줬으면 했다. 교도관 삼촌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땐 호신술 같은 것 아무 필요 없다. 남자 낭심을 세게 차고 죽어라 도망가는 게 최고야.'
발을 들어 올렸다. 엉거주춤 서서 자신의 뺨을 때리던 남자의 낭심을 힘 껏 걷어찼다.
'헉~~~ 씨발~'
고통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리를 구부리며 옆으로 고꾸라졌다. 여고생은 지금이다 싶었다. 몸을 일으켜 세워 미친 듯이 달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조건 뛰었다.
'염병할 년, 너는 잡히면 죽는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에서 쫓아오는 남자를 봤다. 미친 듯이 달렸다. 한쪽 신발이 헐거워져 제대로 뛰지 못했다. 스니커즈의 끈이 풀려 있었다. 신발을 벗어 버리고 뛰었다. 흙바닥에 긁혀 스타킹이 까졌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주세요!'
죽어라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제는 들고양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쫓아왔는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돌리면 잡힐 것 같았다. 바닥의 잔돌이 발에 밟혔다. 긴장되어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리는 것 그것 만이 살 길이었다. 뒤에서 남자 뛰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잡힐 것 같았다. 무서웠다. 남자의 거친 호흡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순간 남자가 그녀의 등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으악!'
외마디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녀의 몸이 흐물거리는 바람인형 같았다.
'퍽~'
넘어지면서 바닥에 튀어나와 있던 돌에 머리를 부딪쳤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에 의식을 잃어버린 듯했다.
'씨발년! 됐어.'
남자가 그녀를 둘러업었다. 체중이 많이 나가진 않았지만 몸에 힘이 풀려 들쳐 메기 쉽지 않았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등에서 흘러내렸다. 양팔을 여고생의 팔 사이에 끼고 뒷걸음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하얀색 브라와 봉긋 솟은 가슴이 보였다. 가슴은 아담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풋풋한 청사과를 보는 듯했다. 얼굴에서 피가 흐르지만 예뻤다. 남자의 아래쪽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버려진 차 사이로 끌로 가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뗬다. 악마의 미소였다. 여고생을 바닥에 눕히고 배 위에 올라탔다.
'빨리 따 먹어야지. 싱싱한 것이 맛있게 생겼네'
교복 재킷을 벌렸다. 셔츠의 단추는 이미 떨어지고 없었다. 매끄러운 살에 하얀색 브라가 보였다. 브라를 위로 올렸다. 두 개의 작은 젖가슴이 나왔다.
'히히히'
남자가 웃었다.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건 괴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 손으로 작은 가슴을 움켜쥐며 다른 손은 치마 속으로 넣었다. 검은색 속 바지가 잡혔다.
'염병, 많이도 쳐 입었네.'
혼잣말을 하며 스타킹과 함께 잡아당겼다. 무릎까지 내려 벗겼다. 스타킹과 함께 둘둘 말린 속바지를 풀 옆으로 던져 버렸다. 치마를 걷어 올렸다. 하얀색 속옷이 보였다.
'쓰읍~'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났다. 거친 손으로 속옷을 내렸다. 부드러운 맨 살에 거뭇거뭇한 음모가 나왔다. 남자는 다시금 술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기절해 있는 그녀의 배 위로 올라갔다.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작은 가슴을 잡았다. 여고생이 눈을 떴다.
'으악~'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기절해 있다 악몽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왔다. 차라리 잠들어 버렸으며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살려주세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살려주세요"
"입 닥치고 있어. 조용히 있으면 빨리 끝내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죄송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여고생이 두 손으로 빌었지만 배 위에 올라탄 남자는 그녀의 뺨을 때렸다.
"으악~ 살려주세요"
"또 소리 지르네"
이번엔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악~'
갑자기 남자가 소리 질렀다. 여고생의 입을 틀어막은 남자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물었다.
'씨발년 빨리 끝내려고 했는데, 더 열받게 하네' 옆에 있던 돌을 주었다.
'퍽! 퍽! 퍽'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여고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다시 기절했다.
'조용하고 좋네.'
남자는 여고생의 다리를 벌렸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엉덩이 밑으로 검붉은 피가 흘렀다. 잠시 후 남자의 괴성이 멈추고 검붉은 피 사이로 노란 액체가 흘렀다. 남자는 몸 안의 모든 걸 쏟아 내 버리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씨발! 내가 뭐 한 거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제야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 여고생의 얼굴이 보였다.
'좆됐네!'
그는 바지를 추켜올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물방울이 하나, 둘 뚝뚝 떨어졌다. 점점 더 많이 떨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내렸다. 내리는 빗 방울이 굵어졌다.
옷이 벗겨진 채 폭행과 겁탈을 당한 여고생은 일어나지 못했다. 잠들어 버렸는지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워 깨어나지 못하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리는 비가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더럽고 불결한 악귀를 씻어내 주려는지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의식이 없지만 기억의 깊은 곳에서 아빠가 떠올랐다. 항상 자신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해주었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를 놓치기 싫었다.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안아주던 아빠가 손이 잡힐 만한 거리에 있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몸은 더 깊게 빠져 들었다. 아빠를 불러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아빠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주변이 어두워졌다. 아빠가 작은 점처럼 보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빠를 데리고 가버린 암흑이 무서워졌다.
'은혜야~ 잘 있었어?'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어 본 목소리였다.
"은혜야. 엄마야~ 그동안 힘들었지?"
"엄마?"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엄마였다.
"그래. 엄마야"
"왜 이제 왔어? 나 많이 힘들었는데. 왜 이제 왔어? 죽도록 힘들었는데."
"미안해. 이제는 엄마가 항상 네 옆에 있어줄게. 미안해 은혜야"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요."
쉼 없이 내리던 비가 서서히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그녀의 차디찬 가슴에도 떨어졌다. 은혜의 심장 뛰는 소리도 비와 함께 느려지기 시작했다. 톡톡 떨어지던 비가 서서히 멈췄다. 그녀의 작고 여린 심장도 서서히 멈추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팀장님 사건입니다."
긴장된 외침이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를 깼다. 강력 1팀의 막내 김종일 경장이었다. 항상 나사가 빠진 것처럼 웃고 다니는 그가 전화를 받은 후 얼굴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슨 사건인데 우리 쫑일이 이리 놀라냐?"
머리 희끗한 서원진 경감이 종일을 놀렸다. 사건이라는 말에도 여유 있는 그의 목소리에 수 십 년간 강력계에서 구른 세월이 묻어났다.
"방금 지구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살인사건이랍니다. 여고생이 강간을 당한 후 살해됐답니다. 변사체는 옷이 벗겨진 상태며, 버려진 교복 재킷에 이름표가 붙어 있고 근처에서 휴대폰이 발견되어 신원이 확인됐답니다."
"그래? 당분간 집에 일찍 들어가긴 틀렸군. 다른 특이사항은?"
"지금 과학수사반에서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출동하자."
원진이 의자에 걸쳐진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는 폴리스 라인이 처져 있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기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동네 주민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진과 동일은 과학수사반이 현장 감식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여고생의 변사체가 보였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여기저기 멍든 상처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이었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진 후라 질척 거리는 바닥에 옷이 벗겨진 채 누워있는 모습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종일이 시신을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원진은 한두 번 본 게 아닌지 변사체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들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사체는 차에 실려 옮겨졌다. 과학수사대의 현장감식이 끝난 듯했다. 두 형사도 현장 조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어휴~ 어떤 개 같은 새끼가 이런 일을 벌인 거야."
"그러게요 팀장님. 여고생이던데..."
원진이 욕을 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도 중학생 딸을 두고 있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주변 cctv 확인해서 영상 전부 따놔 그리고 동종 전과 있는 사람들 데이터 뽑아 놓고. 신원 확인됐다고 했지?"
"네.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 학생입니다. 이름은 '이은혜'입니다."
"가족에는 연락됐어?"
"아직 안 된 듯합니다. 아마도 저희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락은 내가 할게."
동한은 후배에게 시킬 수도 있었지만 유가족에게 하는 신원 확인은 꼭 본인이 했다. 그들의 심정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가족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자신이 그 고통을 겪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잃어버린 부모 생각 하니 깊은 한숨이 나왔다. 강간당한 후 비참하게 살해당했으니 더욱 그랬다.
"팀장님. 방금 국과수에서 연락이 왔는데 좋은 소식입니다."
"야~ 인마. 사람이 죽었는데 좋은 소식이 어디 있어?"
원진이 살해 소식을 알리기 전이라 예민해있어 종일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아... 그게. 살인범 잡을 중요한 단서를 찾았다고 해서요"
"뭔데?"
"변사체에서 정액이 발견됐답니다."
"좋은 소식은 맞네."
원진이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정액이 발견됐으니 50프로는 잡은 것 아니겠습니까?"
"설레발치지 마. 살인 사건 해결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아. 족적이나 모발, 흉기 같은 증거물은 없고?"
"사망 추정 시간에 비가 밤새 내려 증거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해자의 머리를 내려 찍은 돌은 나왔는데 피해자의 혈흔만 나왔지 가해자의 지문은 나오지 않았답니다. 비에 지워진 듯합니다."
"지문만 나왔어도 쉽게 끝나는데. 근처 cctv 영상은?"
"경찰서와 시청 상황실에 확인해 봤는데 범죄 현장이 주택가와 떨어져 있어 cctv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았답니다."
"여고생이 폭행당하고 강간까지 당했으니 비명소리 나 다른 소리가 났을 거야. 주택가와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근처 상가 돌면서 확인해 봐. 주변에 세워져 있던 차량들 블랙박스 전부 확인하고."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저는 차 경사님과 현장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오케이."
원진이 종일에게 수사지휘 했다. 이제 유가족에게 사실 확인을 해야 할 차례였다. 업무수첩을 펼쳤다. 종일이 확인한 피해자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스마트폰 패턴을 풀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이 떨려왔고 신호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이도형 씨 되시죠?]
[네,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목안 경찰서 강력 1팀 팀장 서원진 경감입니다.]
[경찰서요?]
[네.]
[경찰서 강력계에서 왜 저한테 전화를 하죠? 계좌번호가 필요하신 가요?]
도형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있었다. 보이스피싱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원진이 오해받아도 놀라지 않았다.
처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따졌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 따님이 목안고등학교 다니시죠?]
[참나. 그건 또 어떻게 알아냈데. 저 바쁘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저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닙니다.]
도형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원진이 바로 말을 꺼냈다.
[그게 아닙니다. 이런 말하기 죄송하지만. 지혜 양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게 보이스 피싱이지, 뭐가 아니야! 열받게 하지 마시고 딴 데다 작업하라고!]
도형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원진이 사실대로 말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았다.
[따님에게 일이 생겼습니다.]
[끊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세요.]
[지혜 양이 살해당했습니다. 신원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실랑이가 의미 없을 것 같아 원진이 있는 그대로 전했다.
[뭐? 이런 미친놈이 있어? 야! 너 죽고 싶어? 어디다 대고 사기치고 그래.]
[어제 지혜 양 집에 안 들어왔죠?]
[학원 끝나고 친구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간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연락해 볼 참이었는데...]
도형이 말을 맺지 못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순간 무서워졌다. 그래도 보이스 피싱일 거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 안 좋은 일을 당했습니다.]
원진은 죄송하다고 했다. 이런 말 할 때는 자신이 범인이 된 것 같았다.
[......]
답이 없었다. 소화기 너머로 깊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정적이 흘렀다. 원진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이 핏빛 하늘처럼 보였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자 원진이 다시 말을 꺼냈다.
[다시 말씀해 주세요.]
[지혜 양이 어젯밤 측산동 야산 인근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으아악~~~]
비명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도형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무실 동료들이 달려와 흔들었다. 어지러웠다. 주변이 빙글빙글 돌았다. 꿈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형 씨 괜찮아? 어디 안 좋아?"
옆 자리 직원이 물었다.
"이건 꿈이죠?"
"뭐라고?"
"지금 여기는 꿈인 거죠?"
"도형 씨, 정신 좀 차려봐"
동료 직원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바닥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핸드폰을 주워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방금 통화했던 저장되지 않은 연락처가 찍혀 있었다. 순간 도형은 정신을 잃었다.
"이도형 씨 정신이 드세요?"
"여기는 어딘가요?"
"목안 병원 응급실입니다."
도형은 자신이 전화통화를 했던 게 꿈이 아니란 걸 알아차린 순간 기절해 버렸다. 동료들이 그를 응급실로 옮겼다.
"당신은 누구세요?"
"저는 아까 통화했던 목안 경찰서 강력계 서원진 경감입니다."
"안돼~ 안됩니다. 우리 은혜가... 은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
도형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응급실이 난리가 났지만 누구도 도형을 말릴 수 없었다. 원진도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무 안타까웠다.
"저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일단 피해자 신원 확인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도 수사하는데 절차가 있어서... 죄송합니다."
원진이 도형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엉엉엉~ 은혜야..."
도형이 다시 비병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꿈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혀왔다. 가슴팍의 옷을 찢었다. 여전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도형은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이 수척해진 얼굴을 더 초췌하게 만들었다. 경찰에서 은혜의 신원확인을 요청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며칠의 시간이라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은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하 영안실로 향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길이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려가자 병원 관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형을 보자 어두운 표정으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말이 없었다. 따라오라 듯한 표정을 짓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도형은 조용히 뒤 따랐다. 차가워 보이는 철문이 열렸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두웠다. 직원이 스위치를 올렸다. '딸깍~' 하는 소리가 조용하던 곳에 크게 울려 퍼졌다. 정적이 깨지며 불이 들어왔다. 순간 자신이 이 자리에 섰던 게 처음이 아니란 걸 알았다. 십여 년 전 사랑하는 부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도 이곳에 서 있었다.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운명은 그렇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미친 듯이 뛰쳐나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는 움직여주지 않았다. 직원이 영안실안 벽에 붙은 몇 개의 칸 중 하나의 손잡이를 당겼다. 알루미늄 문이 열렸다. 손을 뻗어 선반을 빼냈다. '드르륵' 레일이 돌아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차가워 보이는 곳 위에 눕혀져 있는 시신이 나왔다. 위에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그걸 보자 답답한 가슴이 죄여왔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표정에도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
도형은 말이 없었다. 가슴을 손으로 움켜 잡고 멍하니 하얀색 천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릴까요?"
직원이 한 번 더 물었다. 하얀 장갑 낀 그의 두 손은 가지런히 앞으로 모여 있었다.
"여기는 많이 춥겠죠?"
도형이 힘없이 말했다. 눈의 초점은 없고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우리 은혜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불쌍해서 어쩌죠. 흑흑흑"
"......"
이번엔 직원의 대답이 없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진짜 우리 은혜 맞나요?"
"그건 가족분이 확인해 주셔야... 천을 내리겠습니다."
직원은 덤덤하게 답했다. 유가족의 슬픔을 알지만 절차를 진행해야 했다. 시신을 덮고 있는 하얀 천을 천천히 내렸다. 가려져 있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엉클어진 머리카락이 나오고 은혜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백하게 굳어 버린 얼굴이 보였다. 감긴 눈에는 파란 멍 자국이 보였다.
"은혜야~ 은혜야~ 악~ 아~ 악~"
도형이 비명을 질렀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은혜가 맞았다. 조용했던 영안실은 도형의 외침으로 가득 차 버렸다. 두 손으로 은혜의 얼굴을 감싸 잡았다. 은혜는 눈을 감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그녀의 얼굴에 도형이 얼굴을 비볐다.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그녀 얼굴로 떨어졌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악! 어떤 새끼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니? 엉엉.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다 죽여버리겠어! 누가 이렇게 했냐고? 엉엉~ 우리 은혜 불쌍해서 어쩌냐. 아가, 내 새끼야. 얼마나 힘들었니. 아~ 얼마나 힘들었어. 아빠가 미안해.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악~"
도형은 대답 없는 은혜를 안고 괴성을 질렀다. 차라리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었으면 싶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다음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
직원이 조심스럽게 흐느끼는 도형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다는 것보다 도형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안 돼요. 우리 은혜를 차가운 이곳에 놔두고 갈 순 없어요. 안됩니다. 제가 데리고 갈게요. 아이고~ 불쌍한 우리 은혜. 내 새끼야~ 아이고~ 아이고~ 선생님 우리 애기 좀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엉엉~"
"......"
도형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직원도 도형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많은 유가족들을 봤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가장 괴로워 보였다.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도형이 울다 지쳐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바닥에 쓰러지 듯 누워 버렸다.
"괜찮으세요?"
직원이 도형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정신은 이미 나간 상태였다.
"......"
도형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믿기 힘들지만 은혜가 죽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확인 서류에 간신히 서명을 하고 주차장의 차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꺼내 서원진 팀장에게 전화 걸었다.
[팀장님. 이은혜 아버집니다.]
[아~ 네.]
[방금 신원 확인 했습니다. 우리 은혜 어떤 새끼가 이렇게 만들었나요?]
[아직 범인은 검거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증거가 발견됐으니 조만간 체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진은 사체에서 정액이 발견됐다는 말은 하지 않고 중요한 증거라고만 했다.
[은혜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그게...]
[괜찮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거 아닙니까?]
[그렇죠.]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된 경위인지 알고 싶습니다.]
[측후동 야산 인근에서 야간에 강간당하고 살해된 듯합니다. 옷이 벗겨진 상태였고 몸에 구타 흔적도 보였습니다.]
[흑~흑~흑~.]
전화기에서 도형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희가 빨리 검거해 재판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우리 은혜가 죽어 버렸는데.]
[그래도 잡아서 죗값 치르게 하는 게...]
도형의 대답에 원진이 말을 얼버무렸다.
[알겠습니다.]
도형이 힘없이 통화를 끊었다.
'아악~ 아악~~~ 은혜야!!!'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핸들을 마구 때렸다. '빵빠빵~ 빠빵' 핸들에 달린 클락션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미친 듯이 주먹으로 때리며 소리 질렀다. 한참이 지나 자동차 핸들에 머리를 숙인 채 흐느끼며 주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주형아~]
[형이야?]
[엉~ 엉~ 나는 이제 어떻게 사냐?]
[갑자기 무슨 말이야? 형 울고 있어?]
[아~ 악~ 엉엉~]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동생에게 전화를 했지만 우느라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주형아~ 나는 이제 어떻게 사냐고?]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빨리 말해봐.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악~ 아~악!]
도형은 계속 소리 질렀다.
[형! 지금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야?]
[은혜가 죽었다. 엉엉엉]
[뭐라고? 다시 말해봐. 뭐라는 거야?]
주형은 형의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은혜가 죽었다고 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은혜가 죽었어. 흑흑흑.]
[아니 은혜가 왜 죽어?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은혜가 왜 죽냐고?]
[나 지금 병원이야. 은혜가 차디찬 영안실 안에서 누워있는 병원이야. 주형아 나는 이제 어떻게 사냐? 죽고 싶다. 우리 은혜 불쌍해서 어쩌냐? 엄마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는데. 불쌍한 우리 은혜. 주형아~ ]
[뭐라고? 형 지금 어디야? 집이야? 내가 갈게 만나서 얘기하자.]
[엉~ 엉~]
주형은 형이 울면서 전화했기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지만 은혜가 죽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딸처럼 여겼던 은혜가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만나서 확인하려 했지만 형은 우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주형의 속은 타들어 같다. 도형이 술에 취해 떠들어 대는 말이었으면 했다. 형수가 돌아가시고 술에 취해 전화해 횡설수설하듯 지금도 그런 상태 이길 바랬다.
[형 지금 어디냐고? 울지 말고 빨리 대답해! 왜 이렇게 사람 속 터지게 만들어?]
주형이 전화기에 대고 소리 질렀다. 울고만 있는 형을 보자 화가 났다.
[차 안이야.]
주형의 화내는 소리에 도형이 짧게 답했다.
[차 안? 어딘데?]
[병원 주차장.]
[일단 집으로 와. 만나서 얘기해. 알았어?]
[응.]
둘은 도형의 집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형은 차를 몰았다. 손이 떨려 제대로 운전이 되지 않았다. 은혜가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차를 형의 아파트에 주차시켰다. 도형이 먼저 도착했는지 형의 차가 보였다.
"형!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죽고 싶다."
소파에 축 처진 어깨를 기대고 앉아있는 형은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힘없는 목소리로 죽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주형이 그런 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바람빠진 인형처럼 흐느적거렸다.
"은혜가 죽다니 무슨 말이야? 빨리 있는 대로 말해봐!"
"......"
도형은 대답 없이 여전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난 주형이 형의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봐.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흑흑흑... 은혜가 죽었어."
"그러니까 왜 죽었냐고?"
"살해당했데... 그것도 비참하게. 며칠 전 비 많이 내리던 날. 주형아. 나 이제 살 의미가 없다."
"진짜?"
"방금 병원 영안실에서 신원 확인하고 왔어. 죽고 싶다."
도형이 소파 옆으로 푹 고꾸라 졌다.
"어떡해. 형!"
주형도 형을 부둥켜안으며 울었다. 그 여린 아이가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걸 생각하니 미치도록 불쌍했다.
"주형아~ 은혜가 성폭행당하고 머리를 돌에 맞아 죽었데. 경찰에서 그렇게 말하더라. 우리 은혜 불쌍해서 어쩌냐. 얼마나 무서웠겠니. 우리 은혜가... 비가 쏟아지는 날 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길목에서 그렇게 당했는데 얼마나 무서웠겠니. 그 생각하면 미쳐 버릴 것 같다. 우리 은혜 불쌍해서... 주형아~ 나 이제 못 산다. 도저히 살 용기가 안 난다. 형수가 그렇게 떠나고 은혜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못 살 것 같다. 형도 은혜 따라 갈련다. 불쌍한 우리 은혜. 내가 하늘에서라도 같이 있어줘야 하지 않겠니? 미안하다 주형아. 형은 그만 끝내고 싶다."
"형 그러지 마. 그래도 그런 생각하지 마. 은혜나, 돌아가신 형수님이나 그러길 바라진 않을 거야. 제발 부탁이니 그런 말 하지 마"
"아니야. 우리 가족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도저히 못살겠다. 미안하다 주형아."
도형이 울부짖었다. 자신이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자기도 그럴 것 같았다. 무슨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형이 그러면 나도 형 따라 갈 테니 그렇게 해. 나도 똑같이 할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너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잖아. 너만 보고 사는 제수씨랑 애들이 있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만 조용히 갈 게. 네가 잘 정리해 주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고. 형이 가면 나도 따라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엉~엉~"
도형의 자살하겠다는 말에 주형도 소리 질렀다. 둘은 같이 울었다. 불쌍한 은혜와 형을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범인은 잡았데?"
"아직, 경찰 말로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쉽게 잡을 것처럼 말하더라"
"어떤 새낀지 몰라도 빨리 잡혀야겠네. 쓰레기 새끼"
주형의 입에서 거친 욕이 흘러나왔다.
"그놈 잡히면 네가 있는 곳으로 가냐?"
"그럴 거야. 관할이 이쪽이니까"
"교도소 가면 죗값 치르겠지? 교도소 가면 우리 은혜 죽인 것만큼 고통받겠지?"
"으... 응..."
주형은 '살인자가 교도소에서 죗값 치르고 고통을 받냐'는 형의 질문에 '요즘 교도소는 형이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야'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얼버무려 버렸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