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살인. 10 (효라빠 장편소설)
따스한 햇살이 묵직한 쇠창살을 지나 담당실을 비췄다. 무채색의 차가운 교도소 담당실에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주형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가슴속에 차가운 얼음 덩이가 놓여 있었다. 형의 자살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자 일주일이란 시간이 달력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변은 아무것도 변한게 없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형이 많이 힘들어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잘 살아가길 바라는 은혜의 마음을 알기에 버텨 낼 줄 믿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옆에서 잘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함이 자신을 더 괴롭혔다.
담당실 의자에 앉아 멍하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찔러 넣은 주머니 속에서 편지 봉투가 느껴졌다. 김종일 경장에게 받은 형의 유서였다. 몇 번이나 펼쳐 봐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주형에게]
아마도 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을 때쯤이면 나는 다른 곳에 있겠지. 그곳에 은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너에게 너무 미안하다. 버텨보려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럴 수밖에 없었던 형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너도 알다시피 은혜가 없는 삶은 나에게 아무 가치가 없더라, 그런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건 힘만 들었어. 너를 봐서라도 참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겠구나.
사람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그때까지의 시간이 나에게는 죽는 거보다 더 괴로운 시간이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은혜를 죽인 놈이 교소도 가는 걸 본다고 해서 나한테 달라지는 게 무엇이겠니.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그놈을 용서하는 건 아니다. 꼭 잡혀서 죗값을 치렀으면 좋겠고, 하나님이 벌을 내려 비참하게 죽었으면 하는 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가슴은 무너져 버릴 듯이 힘들고 답답하다.
우리 은혜가 없는 이곳을 떠난다는 게 크게 아쉽진 않지만 은혜를 그렇게 만든 놈을 보지 못하고 간다는 건 씁쓸하구나.
이제는 모든 게 운명이라고 받아 드릴런다.
형이 먼저 떠났다고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잖아. 너라도 사랑하는 제수씨와 조카들 잘 지키고 행복하길 바란다.
주형아~ 내가 안고 가야 할 짐을 너에게 떠 넘긴 것 같아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항상 고마웠다. 사랑한다.
유서를 들고 있는 주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발새끼. 그 개새끼 때문이야. 은혜를 그렇게 만든 그 새끼... 그놈 때문에 형까지 이렇게 된 거야. 죽여버리겠어. 너는 내가 죽여버리겠어. 제발 잡혀만 다오. 내가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린다. 아니 죽는 거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도록 만들어 주마. 앞을 보지 못하게 눈알을 파버리고, 걸어 다니지 못하게 다리를 잘라 버리겠다. 제발 죽여 달라고 말하게 만들어 주겠다.
죄 지은 세상의 모든 놈들을 다 갈아 마셔 버리고 싶지만 일단 너부터 그렇게 만들어 주마. 네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꼭 지게 해 주겠다.'
주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입에서는 거친 말이 나오지만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섬뜩하게 보였다.
화장터에서 유골을 찾으며 형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두 손으로 받쳐든 순백의 하얀 단지 안에는 형의 마지막 온기가 느껴졌다. 형은 조용히 떠났지만 형과 은혜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 했다. 눈물은 말라 버렸는지 나오지 않았다.
주형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불편 끼친 적도 없었고 누구를 원망해 본 적도 없었다. 물 흐르듯이 살아왔다면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말투는 이전의 주형이 아니었다. 악에 복받쳐 모든 게 바뀌어 버린 사람 같았다.
고개를 들자 감방 안에 갇혀있는 수용자들이 보였다. 주형이 변했듯 그들을 바라보는 주형의 시선도 변해있었다. 그전에는 죄를 짓고 들어왔지만 그들도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죗값을 치러야 할 인간으로만 보였다. 모두가 은혜를 죽인 살인자 같았다. 형이 죽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범인이 잡히면 너 있는 곳으로 가는 거야? 그럼 그곳에서 죗값 치르는 거야?'
관할지가 주형이 근무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 생각을 하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살인범이 잡혀 자신이 관리하는 사동으로 오길 바랐다.
'너를 꼭 기다리마......'
주형의 입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담당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주형아. 출근했어?"
형의 장례를 치르고 출근한 주형을 위로하기 위해 성균이 들렸다.
"네. 형님"
주형이 힘없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앉아, 앉아, 일은 잘 처리했고?"
플라스틱 의자를 당겨 앉으며 성균이 물었다.
"어떻게 마무리 하긴 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모른 척하려다 그것도 아닌 것 같아 한번 들렸어. 사람 사는 게 쉽지 않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지...... 너같이 남에게 피해 한번 안 끼치고 살아온 사람도 없는데. 세상 참 불공평해. 착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이 더 생기니. 봐봐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 저 나쁜 놈들은 잘 먹고 잘 살잖아. 너는 전부터 나와 입장이 달랐으니 이해 못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성균이 범죄자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그렇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도 이해합니다. 그동안 제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물건 훔치고 폭행하며,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똑같은 사람이고, 죗값을 치르고 반성하면 용서해줘야 한다 여겼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는 관용보다는 죗값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주형이 성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눈빛이 불타오른다는 말은 주형의 눈을 보고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복수하겠다는 마음에 시뻘건 활화산이 되어 있었다.
"어... 그... 그래... 이제야 내 마음을 아는구나"
너무 갑자기 변해버린 주형의 태도에 성균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내가 봤을 때 인간은 그 자체가 이기적이야. 다만 학습과 교육을 통해 변화를 겪고 공동체 생활 속에서 다듬어지는 거지. 만약 다듬어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해. 그걸 이곳 교도소에서 해야 하는데. 현실은 어떠냐? 다른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며, 남의 물건을 훔치고 들어와 너무 편하게 지내지 않냐? 너도 직접 보니까 알 거 아냐. 요즘 징역이 징역이냐? 생수에서부터 과자, 빵 거기다 귤, 토마토, 사과등 제철 과일까지 구매해서 먹고 티브이로는 밖의 모든 방송이 라이브로 보여주고, 성폭력 범죄 저지르고 들어온 수용자가 전라의 모델들이 나오는 야한 잡지를 구매해서 보고. 그래 그거야 먹고사는 거니까 그런다고 치자. 죄 짓고 들어온 범죄자들이 소란과 난동을 벌여도 보호장비(수갑, 포승 등) 한번 채우려고 하면 복잡한 기록 남기는 등 절차를 지켜야 하고. 몇 시간 사용했다가 식사시간이라고 풀어주고, 취침시간이라고 풀어주고 또 소란 피워 강제력 행사 하다가 수용자가 다치기라도 하면 과잉진압으로 고소당하고. 그래 수용자도 인권이 있으니 마지막까지 그런다고 치자. 그런 악질 수용자들이 직원을 위협하고 폭행했을 때는 어떻게 처리하냐? 수용자가 교도관에게 폭행당했다고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위에서는 직원들은 범죄자 다루듯이 관리하면서, 수용자에게 폭행당한 직원은 혼자 병원 가서 알아서 치료하고 뒷감당도 각자 처리하는 식 아니지 않냐? 이게 우리나라 교도소의 현실이잖아.
나는 밖의 지인들에게 세계에서 우리나라 교도소처럼 편하고 인권 친화적인 교도소는 없다고 말한다. 정말 이건 아니라고 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너무 많아."
성균이 교도소의 현실에 대해 울분에 찬 목소리로 토로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이 함으로써 사회정의 실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교도관의 처우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감정이 더 격해지고 분함을 느꼈다.
"맞습니다."
그전 같으면 성균의 주장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을 주형이 동의했다. 주형은 죄를 짓고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같은 사람이고 그들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수용자들을 교정교화 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바뀌게 만든다는 것에 자긍심도 있었고 그게 자신의 역할이고 사회에 기여한다고 믿었다. 성균과 주형은 생각은 달랐지만 둘 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혜가 그렇게 되고 형까지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리자 그는 바뀌었다. 자신이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자 그전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는 원한과 복수심이 모든 걸 덮어 버렸다.
"저 감방 안에 들어가 있는 도둑놈 새끼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야. 비열하고 더럽고 잔인하지. 빈틈만 보이면 직원을 이용하려고 하고, 지들끼리도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주형아 교도소가 왜 돌아가지는지 알아?"
"글쎄요."
"내 말에 힌트가 들어 있었는데. 한번 맞춰봐"
"잘 모르겠는데요"
주형이 여전히 몸에 힘이 빠져 보이지만 눈에는 살기가 가득 찬 표정이었다.
"이이제이라는 말 알지? 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린다. 적을 이용해 다른 적을 제어 한단 뜻이지. 나는 이 표현이 이곳 감방에서 아주 잘 어울린다고 본다. 수용자들이 방 안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나 투서를 하고, 누가 무슨 범죄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제보하는 거 말이야.
우리 교도관들이 24시간 잠 안 자고 수용자 관리 한다고 하지만 그 많은 인원을 전부 어떻게 관리하냐. 교도관의 주된 목적이 교정교화라고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니? 인원이 부족해 완전한 4부제도 못해 야간 근무를 끝내고 온전히 쉬지도 못하고 근무 불려 나오는 실정인데.
말이 옆으로 샜지만 그만큼 죄를 짓고 들어온 수용자들이 간사하다는 뜻이야. 나는 저들을 절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만기 출소해서 사회로 나간다면 일반인으로 생각하겠지만 여기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믿지 못하고 용서 같은 거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성균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며 일장 연설을 했다.
"이제는 형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짓고 들어 온 놈들이 편하게 지내면 안 되죠. 지금까지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수용자들을 관리하다 보니 피해자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사기만 쳐도 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모든 가족들이 힘들게 살아가는데, 살인이나 성폭력을 당한 유족이나 당사자 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평생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겠죠. 가해자들이 반성을 한다면 그나마 덜하겠지만 여기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 범죄자들 중 본인들이 직접 반성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직원 눈을 피해 편하게 살아가려고만 하고, 잔머리를 굴려 모사나 꾸미고, 지금까지 근무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게 정말 한심합니다. 제가 피해자가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나가서 또 범죄 저지를 궁리 하고 있는 저 인간들을 보니 가슴이 터지려 합니다. 불쌍한 우리 형과 착하디 착한 은혜가 떠올라 미쳐버릴 거 같아요."
주형의 말에 울분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널 위로하려고 왔는데 오히려 더 화나게 한 거 같네."
성균이 흥분한 주형을 보며 놀랬다.
"아닙니다. 이렇게 말이라도 하니 속 시원합니다."
주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지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지려 하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성균이 돌아가고 주형은 혼자 남았다. 네모난 담당실이 감옥 안의 감옥같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미아와 아이들이 어깨를 짓 누르고 있었다. 교도관이라는 힘든 일을 가족 때문에 버티며 해왔지만 지금은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는 게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게 재밌고 즐거웠는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점점 웃을 일도 없어지고 괴로운 일만 생겼다. 자신이 버터야만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쉽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복잡한 동굴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딩동~ 딩동~ 딩동~'
담당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교도소의 미지정 사동은 주형에게 잠깐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10번 방 인터폰 눌렀어요?]
[부장님. 1800번 곽태성입니다. 죄송한데 잠깐 면담 좀 할 수 있을까요?]
[알았어. 나와]
출소 후 다시 들어와 징역을 살고 있는 곽태성이었다. 처음 징역형을 받아 수용생활을 할 때의 안타까움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에 하자고 말하려다 입버릇처럼 나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거기 앉아. 무슨 일인데 그래?"
"다름 아니라 부장님에게 부탁 좀 드리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무슨 부탁?"
예전의 따뜻한 목소리의 말투가 아니었다.
"저는 지금까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저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부모님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 보육원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저의 엄마라는 사람이 절 찾는다구요. 엄마가 살아계신다는 거에 놀랐지만, 저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만나기를 거부했습니다. 엄마 때문에 제 인생이 망가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저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지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교도소에 들어와 보니 제가 잘못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모든 잘못은 제가 저질러 놓고 남 탓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고 보고 싶어 졌습니다."
곽태성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반성이라도 하듯 머리 숙였다.
"그... 그래?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곽태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그립다고 하자 주형의 마음이 흔들렸다.
"보육원에서 자랄 때 부모님이 찾아오는 애들은 더러 있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기에 보모님 모두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왜 버렸는지 이유도 들어보고 싶고 아버지의 존재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음... 하~"
둘만 있는 담당실에 주형의 깊은 호흡이 끊기자 고요해졌다. 뭔지 모르는 긴장감이 돌았다.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냐?"
"엄마에게 제가 여기 있다고 연락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주형이 말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형은 형의 복수를 다짐하듯 김성균 주임과 말을 나눴다.
"부장님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곽태성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알았으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
"네.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고충처리팀을 통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소송에 관련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결해 줘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해주고 말고는 담당 근무자의 재량에 속하는 부분이었다. 순간 가슴속에서 짜증이 밀려왔다. 형과 은혜의 복수를 다심했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곽태성의 사연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자신이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는데 어른이 돼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나는 왜 이럴까. 왜 마음이 독하지 못할까. 미쳐버리겠다. 그냥 안된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될 거를 왜 이렇게 약해 빠졌을까...'
주형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짜증 나. 짜증 나 미쳐 버리겠네.'
냉정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분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의 수용자들이 있는 사동의 담당실에 앉아 있으면 감방의 작은 소리도 예민하게 들렸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건 아닌가, 규율위반 행위를 저지르는 건 아닌가, 동료수용자를 폭행하거나 괴롭히는 건 아닌가 하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렇다 보니 담당 근무자는 자기도 모르게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었다.
손끝하나 움직이기 싫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갔다. 복도 끝에서 검은색 제복을 입은 직원이 소리치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기동순찰팀 김성균 주임이었다.
"방이 왜 이렇게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까? 처방받은 약도 기간이 지났으면 반납해야지 왜 보관하고 있어요?"
성균이 최태식의 방문을 열고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었다.
"주임님! 방은 정리하려고 했고, 약은 먹으려다 깜빡한 거 아닙니까? 왜 사사건건 트집이세요?"
"수용자들이 규율에 맞게 생활하도록 지시하는 게 내 일이라 그럽니다. 내가 하는 말이 듣기 싫으면 교도소에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뭘 잘했다고 큰소리예요?"
"아니. 다른 직원들은 별말 안 하는데 주임님은 왜 모든 일에 잔소리입니까? 아씨 짜증 나네"
최태식이 성균의 지시에 꼬박꼬박 토를 달았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문제 유발자에 자해 전문인 최태식과 역이기 싫어 사소한 것은 참견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성균의 말에 반박하고 있었다.
최태식이 자해를 해 몸에 장애가 생기고, 징벌을 받으면서 까지 규율 위반을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문제수가 되면 일반 직원들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식으로 경미한 규율위반 같은 건 지적하지 않았다. 위에서는 적당히 봐주면서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살게 하는 게 수용 관리 잘하고 있다고 용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균은 그렇지 못했다. 작은 규율 위반 행위가 쌓여 교도소 전체의 질서를 훼손한다고 믿었다. 그런 근무 방식이 훨씬 힘들었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바꿀 순 없었다. 그건 업무 태만이고 자신의 초심을 잃는 거라 여겼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최태식 씨 교도소 왜 들어왔어요?"
"뭐라고요?"
"교도소 왜 들어왔냐고! 당신 독립운동하다 들어왔어? 아니면 시험 봐서 들어왔어? 아니잖아. 범죄 저질러 들어왔잖아. 그랬으면 규율 잘 지키고 생활해야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참나.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또 징벌먹이게? 알아서 하세요. 내가 참고 있는지. 또 한 번 해봅시다."
최태식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또 한 번 해보자면 내가 쫄지 아나? 그래 한번 해보자"
성균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둘의 말싸움 소리가 사동에 울려 퍼졌다. 금방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악~ 악~ 그만. 그만하라고!!!"
성균의 뒤에서 귀가 터질듯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둘이 이렇게 싸울 거예요. 여기는 내 사동이니까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주형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면서 외쳤다.
성균과 최태식은 주형의 화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순하기만 하던 그가 그처럼 고함을 지르는 건 처음이었다.
"어... 그... 그래. 알았어. 네 사동인데 미안하다."
성균이 주형에게 사과했다.
"최태식 씨 빨리 방 정리 하세요"
"흠. 알았습니다."
주형의 흥분된 모습에 최태식도 아무 말 없이 성균의 말을 따랐다.
"가자, 가. 담당실로 들어가자"
성균이 씩씩거리는 주형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돌려세웠다. 주형이 어떤 상태인지 알기에 자신 때문에 더 힘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형은 터벅터벅 담당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균은 주형에게 사과하며 진정시켰다. 주형이 흥분을 가라앉히자 성균은 다른 사동으로 순찰을 가고 담당실에는 또 주형만 혼자 남았다.
'젠장, 엄마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고, 이렇게 나약해 빠져서 복수는 어떻게 하냐...'
주형은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앞만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