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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솔현 Oct 24. 2024

투병기2

병이겨내기

나는 우울증이 심한 환자다. 병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14년 전과 다르다. 지금은 정상인보다 더 정상인이 되었다. 건강미가 철철(?)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우울증이 심하게 자학도 했는데(신체자학X, 심리적 자학O) 자살하지 않고 버텼냐고 물을 수 있다. 실제 첫 주치의가 물었다. 그래서 내 대답은 내 지나온 인생을 끝내기엔 억울한 게 많아서 못 죽고 있다고. 그러면서 집에 돌아가서 주치의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분석하며 자학을 여전히 했다. 


난 분석력이 좀 좋은 편이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모든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심코 던진 돌에 난 피 흘려 쓰러졌다. (비유가 좋다.) 혼자 있을 때 틈틈이 자학이 이뤄졌고 내 자신의 자존감, 자기애가 사라졌다. 내가 왜 사는 지 알 수가 없긴 했다. 


‘죽어야 하는 데….. 이 거추장스런 몸을 버려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생각났다. 그래서 머리 속에는 어떻게 죽을 지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실행은 하지 않았다. 왜? 내 지나온 버틴 인생이 죽으면 억울해서. 거기에 심한 무기력도 같이 와서 누워 있는 송장처럼 지냈다. 관 속의 송장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걸 끄집어 낸 건 어머니다. 좀 혼내면서 방 밖으로 끄집어 내어 집안일을 시키셨다. 아니 가르쳤다. 

내가 20대 말까지 살림의 ‘ㅅ’ 자도 몰랐다. 그만큼 무심한데…..-지금도 무심하다.- 집에서도 내 방에 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짜증 나 하셨다. 그리고 30세가 되었을 때 난 ‘ㅅ’자가 있는 ‘살림’을 알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노력이 시작 되었다.


14년인 지금 되돌아 보면 어머니의 노력에 무한의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살림을 배우고 난 후 2021년에 어머니가 참 행복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 잘 하네. 언제 용되나 했더니 용 되었고 이제 사람 구실 한다.”


이 말 하셨을 때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진 걸 봤다. 나도 감개무량했다. 12년만에 사람이 되었더니. 전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몸만 큰 애기였으니까. 그 와함께 내 자존감도 높아졌다. 


둘다 참….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엄마의 강한 훈련- 아프다고 봐주기 없었다.-에 이를 버틴 나도 대견스럽다. 어쩌다…. 집을 뛰쳐나갔다. 일하러 직장으로 나갔다. 직장 다니니 더 힘들었는지 2년을 채우지 못했다. 내가 달라진다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더 상태가 나빠질 거라 걱정을 했다. 그래서 퇴직을 종용을 부모님 두분 다 하셨다. 오히려 아버지는 그냥 돈 벌라, 정상이지 않냐지만 나의 상태를 아는 어머니는 절대 직장생활 안된다고 강하게 반대하셔서 퇴직을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직장생활을 반대에도 했다. 어머니의 엄격한 훈련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집을 박차고 독립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였다. 다시 부모님과 함께 였다. 직장생활 하며 거기서 행복했느냐…..아니였다. 오히려 더 불행해 지는 느낌이였다.


난 묘하게 어딜가나 환대를 받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일할 뿐이데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생을 많이 한다. 괴롭힘도 많이 겪었다. 모임에 가도 그렇다. 잘 어울리는 듯해도 어느 순간 그 모임에 빗겨져 나와 있다. 


워낙 사람에게 배신도 많이 당해서 믿지 않는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사람은 ‘나 너에게 뒤통수 칠 거야. 조심해’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 같다. 지금도 이 건 사람 믿지 않은 건 여전하다. 


이 두 경험을 통해서 나는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지금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쉽사리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내가 남자고 여자고 사람을 믿지 않게 된 건 대학교 2학년때 경험에서였다. 그냥 책이나 파묻혀 간접경험으로 뒤통수 맞아 살해당하고 전 재산 탕진한다는 글에 ‘설마’였다. 그러나 내가 이상한 집단에 대학 동기나 후배에게 갔다 오니 이 ‘설마’가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지키려면 사람을 믿어 선 안된다고 신념이 생겼다. 이 신념은 첫 직장에서 더 굳혀졌다. 다들 설렁설렁 관계를 맺는 모습과 소문에 의한 괴롭힘에 괴로웠지만 소문을 잠재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첫 직장에 비정규직으로 버텼다. 그래서 소문을 잠재우고 계약직이라 계약 끝나서 첫 직장을 나왔다. 그 후도 작은 직장에 일을 했고 더 상태가 심해져서 두 번째 일자리에서 관두자마자 상급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작했다.


내 상태가 이렇다. 자존감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능력자가 되어 어깨에 힘들어 갔다. 근자감(근거 있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 


지금은 외국어도 3개국어가 일상대화가 가능하다. 특히 영어를 잘 한다. 일본어, 스페인어는 20년에 시작해서 아직 영어에 못 미친다. 그래도 말을 할 수 있으니. 거기에 뜨개질하고, 영상제작도 할 수 있으며, 잘 쓴다는 칭찬을 들으며 자신감을 더욱 얻은 글쓰기도 하게 되었다. 살림 중에서도 요리를 잘한다. 부모님이 인정해 주셔서 힘이 난다. 아, 그림도 그리는 데 대중(?)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서 이건 좀 자신감이 없다. 그래도 그림그리기는 부모님이 적극 응원을 해 주고 계신다. 오히려 글쓰기를 말린다고나 할까.

그림은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게 있지만, 글은 머리 속에 상상을 해서 더 희한한 생각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영상제작과 그림을 선호하시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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