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중 사별의 고통이 가장 강도가 높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이혼이나 해고로 인해 느끼는 것보다 1.5배에서 2배 이상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해요. 특히 배우자가 암처럼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하는 경우는 병의 진단부터 수술, 치료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경험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지치게 됩니다. 병마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 우울감을 함께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오랜 시간 모든 에너지를 쥐어 짜내 엄마를 간호했던 아빠가, 엄마를 보내고 어떤 감정이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엄마 장례를 치르고 간만에 만난 아빠 얼굴은 헬쓱했습니다.제가 출산을 했지만 아빠는 코로나 시국이라 백 일이 지나서야 손자를 보러 올 수 있었어요. 아빠는 침대 안에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이었지만 아빠는 차마 환하게 웃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떠나 보내고 손자를 맞이하는 길목에 고독하게 서 있는 듯 했습니다. 짙게 드리운 무거운 표정에서, 아빠가 엄마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떠난 후 아빠는 외롭게 지냈을 겁니다. 하필이면 사별은 정년퇴직과 겹쳤습니다. 40년을 한결같이 충직하게 다녔던 회사였어요. 아빠는 '남편'과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을 한 순간에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사랑, 사람, 공간, 시간,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었겠지요. 엄마도 없고 회사도 가지 않는 그 허전한 시간과 공간의 공백을 아빠가 어떻게 채워갔을지 멀리 떨어져 사는 저는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아빠는 얼마간 외로움을 자처하는 사람 같기도 했습니다. 제 전화도 잘 받지 않았을뿐더러, 어쩌다 통화 연결이 돼도 '그냥 있다'며 짧게 전화를 끊어냈습니다. '그다지 잘 지내지 못하지만 어찌어찌 버텨내고 있을' 그 시간을 딸에게 무어라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인 줄은 잘 압니다. 전화 한 두 통으로 그 깊은 외로움과 슬픔을 덜어낼 수 없음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습니다.
아빠 홀로 살아가는 친정집은 엄마가 없는 티가 났습니다. 아빠가 청소를 한다고 했지만 화장실엔 물때가 꼈고 주방도 엄마가 관리하던 것에 못 미쳤습니다. 엄마가 매 계절 털고 관리했을 침구에서는 묵은 냄새가 나서 몇 번이나 "아빠, 이제 버려야 해"라고 민망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마가 제게 '아빠 홀아비 티 나지 않게 잘 챙겨주라'고 누누이 당부했었지만, 제가 멀리 사는데다 아빠도 원치 않았기에 살뜰히 챙기지 못했습니다. 마음만 무거울 따름이었지요.
언제였을까. 처음으로 아빠가 '잘 있다'며 사진을 한 장 보내온 적이 있습니다. 아빠 사진도 아니고, 바닷가를 배경으로 홀로 선 자전거 사진이었습니다. ‘자전거 타고 운동도 하니 아빠 지내는 것은 염려 말라’는 의미였겠지요. 그러나 제 눈엔 그 자전거가 어찌나 외로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아빠는 홀로 부단히 노력했을 겁니다. 취미생활에 심취해도 보고, 사람들과 자전거나 달리기도 나가고, 회사 다닐 때는 못 하던 동창회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예전엔 엄마와 회사 일로 채웠던 그 시간들을 여러 가지 활동들로 메우며 애를 썼을 겁니다. 그렇게 이전의 삶으로부터 힘겨운 발걸음을 떼며 걸어 나왔겠지요. 평탄치 않았겠지만 아빠는 그래도 천천히 조금씩 새로운 일상을 일구어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기일을 넘긴 올해는 아빠가 작년보다 밝습니다. 이번에 부산에 들렀을 때는 아빠가 전에 없이 사위에게 맥주 한 잔 하겠냐고 권하네요. 맥주를 몇 모금 넘긴 아빠가 요즘 무얼 하며 지내는지 소소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이런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 조차도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엄마 없는 일상 이야기를 한다는건 마음이 아리고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이젠 손자와도 축구공을 차면서 아빠가 입꼬리가 귓가에 걸리게 껄껄 웃기도 합니다. 이렇게 거리낄 것 없이 웃기까지 아빠는 그 얼마나 힘든 감정의 산을 굽이굽이 넘어와야 했을까요.
아빠한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아빠, 힘든 시간을 잘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아주 많이 사랑해.
오래도록 건강하게 우리 곁에 있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