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엘레지
登樂遊原 황혼의 엘레지
李商隱 812-858
向향晩만意의不불適적 날이 늦도록 갈피를 못 잡다가
驅구車차登등古고原원◎ 수레 몰아 고원에 올라보니
夕석陽양無무限한好호 석양은 무한 황홀한데
只지是지近근黃황昏혼◎ 다만 황혼이 가깝구나.
向晩意不適
向晩 날이 저물어가다. 晩은 저녁. 意 품은 뜻, 의지, 계획. 不適 마땅치 않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다.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주의를 정하지 못하다를 ‘갈피를 못 잡다’라고 옮겼습니다. 저물도록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의 갈등이 심했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환희, 찬양, 웅지, 득의의 시도 있겠지만 마음의 갈등과 고통, 시련이 없으면 좋은 시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詩心을 詩鬼(시귀)라 했고, 이규보는 詩魔(시마)가 씌웠으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시를 쓴다는 일은 괴로운 작업이란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시인일수록 다른 사람들보다 순탄치 못한 삶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시인들은 작가들보다 배고픈 사람이 많습니다.
驅車登古原
驅車 수레를 몰다. 登古原 고원에 오르다, 높은 곳에 오르다.
고원은 장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락유원은 장안의 명소였습니다. 수레를 몰아 낙유원에 오를 만큼 그의 신세는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당대 이름 있는 가문 출신으로 뛰어난 詩才 뿐 아니라 박학한 학식을 고루 갖춘 名士였습니다. 그러한 그였지만 당쟁에 휘말려 고초를 많이 겪었습니다. 삶이 여의치 못하여 이곳에 올라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했을 것입니다.
夕陽無限好
夕陽 석양. 지는 햇빛. 無限好 경개가 한없이 좋다.
황혼과 연계하여 ‘황홀’이라고 옮겼습니다. 명소의 석양의 경치가 무한 좋았다고 했지만 황혼이라면 좋을 수만은 없는 석양입니다.
只是近黃昏
只是 다만. 또는 정작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황혼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줄어들 것입니다. 是는 자연스럽게 서술격 조사로 번역이 되므로 따로 옮길 필요 없습니다. 近 가깝다. 닮다. 黃昏 황혼, 저녁놀.
무한 황홀한 경치이지만 금세 어둠에 잠길 막판이니 머잖아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樂遊原은 당시 경치 좋은 명소로 유명했던 곳이므로 그 석양의 황홀한 경치에 마땅히 득의의 詩心이 일어날 만하였지만 오히려 황혼을 탄식하였으니 그의 절실한 失意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시 전편에 실의와 좌절의 심경이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해가 다 가도, 새 해를 앞에 두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처지이지만 삶의 황혼에 서니 이 시가 눈에 띄어 옮겨보았습니다.
이상은은 역사상 유명한 ‘牛李의 당파싸움’에 휩쓸려 영욕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의 삶에 이와 같은 시련이 많았기 때문에 이상은의 시에는 애상적이고, 우울한 시가 많습니다. 그러나 좌절과 실의를 이렇게 아름답고 감각적인 시어로 잘 표현했기 때문에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유미주의(唯美主義) 시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유미주의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시풍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