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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Jan 26. 2024

한시를 우리시로 읽으세요 69.

술 핑계


問劉十九       白居易   772-846     


綠螘新醅酒  갓 익은 술 걸러내어

紅泥小火爐  질그릇 화로에 올려놓다.

晩來天欲雪  날은 저물고 눈이 올 듯하니

能飮一杯無  한 잔하지 않을 수 없잖은가?     

 

  거이는 백락천의 필명입니다. 이름처럼 樂天적인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居易의 易처럼 시를 쉽게 쓰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시골 아낙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도 쉽게 노래 부를 수 있는 악부시를 많이 지었고, 글자를 갈고 닦기보다는 알기 쉬운 시를 지향했습니다. 

  劉十九는 유씨네 19째 아들입니다. 대가족 시대에서는 형제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 어려우므로 번호를 붙여 부른 것입니다. 더구나 축첩제도가 있었던 시대에 그 많은 형제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십구에게 묻는 것은 사실 술 한 잔하자는 은근한 권주가였습니다.       


綠螘新醅酒

綠螘 술단지에서 발효되어 일어나는 포말, 버큼. 잘 익은 술은 녹색을 띠고 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개미를 닮았다고 해서 비유한 말입니다. 혹은 금장경예(金漿瓊醴)- 금빛옥술이라고도 하니 술의 극찬입니다. 綠酒紅花(녹주홍화- 푸른 술과 붉은 꽃)는 맛있는 술과 아름다운 꽃 여자, 즉 질펀한 술자리를 말합니다. 新醅酒 갓 익은  술. 입맛을 다셔가며 술을 걸러내는 술꾼의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紅泥小火爐

紅泥 질그릇. 小火爐 작은 화로. 질박한 생활인의 모습. 걸러낸 술을 질화로에 올려놓고 데우는 장면입니다.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백주(白酒)는 데워 마셔야 제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곳이므로 일단 여기에서 문장을 종결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의 사건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晩來天欲雪

晩來 晩은 밤. 즉 날이 저물다. 天欲雪 눈이 올 듯한 하늘. 欲은  -하려고 한다, -할 것 같다. 날은 저물고 눈이 올 듯하니 길 떠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서 눌러 앉아 술이나 마시자는 뱃장입니다. 날이 궂거나 눈이 내리면 술 먹기 좋은 분위기인 것은 술꾼이라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 오는 날이면 어차피 공치는 날이므로 빈대떡 부쳐서 술 마시던 일이 많았습니다.       


能飮一杯無

能飮 술을 마실 수 있다. 一杯 술 한 잔. 그러나 상황으로 보아 한 잔으로 끝날 리 없으니 한 잔은 그저 말일 뿐입니다. 설령 한 잔이라 해도 술잔의 크기가 문제입니다. 無는 能과 어울려 의문문을 만듭니다. '한 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시는 가장 짧은 5언절구이기 때문에 진술이 극도로 축약되어서 제목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술꾼으로서는 술이 중요한 것이지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상관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은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잖아서 아닌가?’라고 능청을 떨고 있으니 술꾼들의 술핑계는 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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