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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Aug 01. 2023

'서일페'에 간 문구덕후

직장인을 설레게 하는 취미


책 읽는 토끼가 그려진 스티커를 다이어리에 붙이고 그 옆에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을 적을 때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내 취향이 묻어나는 물건들로 둘러 싸여 있을 때 마치 나 자신을 '덕질' 하는 기쁨을 느낀다.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도, 배우자도 아니며,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달래주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 이라는 사실을 나이가 들 수록 선명하게 느낀다. 어느 장소에 가야 내 심장이 뛰고 눈에 생기가 돌까. 나에게 뭘 해줘야 '이 맛에 산다!' 하는 마음이 들까.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문구점’에 갈 때가 그 어느때 보다 두근거렸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몰래 나와 먹던 떡볶이가 한창 맛있을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체육복은 연두색이었다. 연두색 체육복을 입은 뚜비 군단은 야간자율학습시간 직전 문구점으로 내달린다. 하늘 아래 같은 립스틱 없듯이 하늘 아래 같은 펜 없도다. 소녀들은 '어머 이거 사야해!' 를 외치며 신상 펜이나 노트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아마도 문구류 구입할 때 느끼는 짜릿함은 그 때부터 맛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알록달록한 색깔펜과 형광펜을 사 모으다 보니 속이 꽉채워진 김밥 마냥 통통한 필통을 자랑하게 되었고, 우리네 뚜비 군단들은 그런 필통들을 분신처럼 들고 다녔다. 참고서와 문제집들로 가뜩이나 무거운 가방에 통통한 필통이 무게를 더하더라도 언제나 함께였다. 그러던 소녀는 자라서 일러스트 페어에 가서 그 시절 필통 하나 값보다 족히 열배는 비싼 돈을 통쾌하게 쓰는 어른이 되었다.


만약 엄마가 스티커와 엽서 하나하나의 가격을 알게 되고, 내가 얼마나 많은 스티커와 마스킹테이프, 엽서 등의 '종이쪼가리' 들을 쟁이고 사는지 안다면 시원하게 등짝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만년필의 세계를 엄마가 알게 된다면 나는 솔직히 마음이 많이 조마조마해진다. 그나마도 '당근마켓'에서 판매가보다 저렴하게 만년필을 (몇 자루) 사들이긴 했지만 아마도 엄마 눈에는 그 펜이 그 펜일테고, 똑같은 검정잉크가 들어갈 텐데 왜 이렇게 돈을 엄한데 쓰냐고 할 테니 말이다. 마음 한 켠으로는 회사에 취직해 돈을 버는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하고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어서 엄마의 걱정을 덜게 해 준다는 사실에 요상한 안도감이 든다.


문구덕후인 내 마음에 기름을 드럼통으로 들이붓는 날이 있으니, 바로 '서울일러스트페어 (줄여서 서일페)' 날이다. 수십명의 일러스트 작가들이 코엑스에 모여서 자기 만의 세상을 선보이는 이 날은 문구인들의 축제요. 나 같은 문구덕후에게는 '만수르'의 마음을 갖게 하는 유일한 날이다. 서일페 첫날인 목요일, 오후반차를 내고 고삐 마냥 매고 있던 회사 사원증을 고스란히 풀어놓는다.



‘코엑스야 기다려라, 언니가 지갑들고 간다.’



오후 반차를 내서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 넉넉한 9호선 급행 열차에 몸을 싣을 수 있었다. '서울일러스트페어'는 목, 금, 토, 일 행사가 진행된다. 평일인 첫날 혹은 둘째날이 비교적 사람이 덜하고, 6시 마감이 되어 가면서 사람이 빠지기 때문에 오전보다는 살짝 늦은 오후에 가야 여유롭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안다.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했듯이 문구도 사 본 자 만이 자기 취향을 안다. 내가 노란색 계열을 좋아하는 지 아니면 푸른색 계열을 좋아하는지, 텐션 높은 강아지 그림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한손으로 으스대며 운전하는 고양이 그림을 좋아하는지, 펜선이 진하고 또렷한 그림체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흐느적하면서 편해 보이는 그림체를 좋아하는지 말이다. 캔버스에 그린 유화를 많이 볼 수록 식견이 높아지고 선호하는 그림 스타일이 생기듯, 일러스트 그림도 많이 볼 수록 내가 어떤 작가 스티커에 지갑을 열게 되는 지를 알 수 있다. 취향을 알기 전에는 광활한 코엑스 전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적어도 3시간 이상을 소요했지만 내 취향을 알게 된 지금은 내 마음속에 어느 정도 체크리스트 라는 것이 있어서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살까 말까 고민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매해 여름과 겨울에 열리는 서일페 중 절반이 지났다. 이번 여름 서일페에서 넉넉히 사온 스티커와 떡메모지를 바라보기만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끼지 않고 다이어리와 일기장에 가득채워 일상을 풍성하게 하는 기록을 남겨야지. 다 소진하게 되면 날씨가 추워질 즈음 다시 문구덕후들에게 서일페 초정장이 올테니 그 때 때 새 마음으로 다시 지갑을 열 것이다. 스티커 살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오늘도 직장인은 힘차게 출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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