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였다.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살점을 먹기 좋게 잘라 접시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의 살점이 얼마나 맛있는지 맛을 보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살점을 떼어주기 시작했다. 저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궁금했다.
'내 살점이 맛있을까? 맛없으면 어떡하지?'
나는 어느 부위를 접시에 올려놓을지 결정을 못 하고 남들이 살점을 잘라내는 모습만 유심히 관찰했다.
- 2023.04.30. 일기 중 -
최악의 밤을 보냈다. 웬만한 코골이에도 꿈쩍 안 할 정도로 잠 귀가 어두운 편인데 어젯밤엔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어제도 늦은 시간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미 침대가 꽉 찬 상태였기 때문에 알베르게 관리인이 주방에 매트리스를 깔아주었다. 잘 준비를 하는데 방에 세 살 된 귀여운 아이와 엄마가 들어왔다. 밤이 추운데 두꺼운 옷이나 침낭도 없었다. 남은 매트리스도 없었는지 요가매트 세 겹만 들고 들어와 그 위에 누웠다. 내 매트리스가 싱글사이즈보다 살짝 컸기에 같이 매트리스에서 자자고 제안했다.
그의 이해 안 되는 행동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데 매트리스 밑에 요가매트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불편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근데 내가 누워 있는 곳까지 쿡쿡 찔러댔다. 덕분에 매트리스 높이가 달라져서 팔 하나는 붕 뜬 상태가 되었다. 그는 다 넣고 나서야 괜찮냐고 물었는데 못 잘 정도는 아니니 괜찮다 말하고 눈을 감았다.
아이는 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엄마가 휴대폰으로 틀어준 유튜브를 보고 있었고 엄마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이는 불편했는지 자꾸 발을 차며 소리를 내었는데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보니 잠에 드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래도 너무 귀여운 아가이니 작은 발이 날 차는 것까지는 귀여워 참을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엄마의 휴대폰 배터리가 닳고 나서 시작되었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엄마를 찾기 시작하는데 엄마는 아이를 조용히 시키려고 모유수유를 했다. 아이가 싫다고 막 저항하는데 그 소리가 울려서 어찌나 크던지… 아기가 내는 소리니 어쩔 수 없지… 한창 그럴 나이지… 생각했다. 또 아이는 코가 막혀서 모유를 먹으며 숨이 차는지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질식하면 어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이는 그냥 숨을 쉴 때도 숨 쉬기 힘들어 보였는데 엄마는 익숙한 건지 별 신경을 안 썼다.
아이가 소리 지르다 울고, 울면 젖 먹이고 하는 과정이 새벽 두 시까지 반복되었다. 그럼 중간에 주방으로 나가던지, 그 모든 움직임을 내 몸을 건들지 않고 할 수 있는 거리로 자리를 옮기던지, 아니면 최소한 사과라도 하던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냥 누워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는 건 뭐지 싶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이게 일상일 엄마가 안 쓰러워 나야 하룻밤인데 싶었다.
‘그래. 아이와 엄마가 까미노를 걷고 알베르게에 묵을 권리는 있지. 방을 이따구로 배정한 관리자의 잘못이야.’
새벽 두 시가 넘어가니 안 되겠다 싶었다. 어차피 못 잘 거 아이랑 놀아주자 싶어 내 휴대폰으로 애들이 볼만 한 것을 틀고 리액션하면서 놀아주었다. 엄마는 드디어 조용해졌네 싶었는지 잠에 들었다. 내가 튼 영상이 아이의 취향 저격에 실패했는지 아이는 또다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새벽 네 시가 되었다.
피곤함에 제대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오늘 밤 잠은 다 잤다는 생각에 풀어놓은 짐을 하나씩 다 배낭에 담았다. 아직 밖이 깜깜해서 나가긴 싫었지만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건 더 곤욕일 것 같아 가방을 들고 나왔다.
지나가야 할 길은 모래사장 위에 세워진 데크길이었다. 드디어 쓸 일이 생긴 헤드랜턴은 배터리가 없었다. 그냥 걸으려고 했는데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바닷가길에 울리는 파도 소리가 무서워 몇 발자국 못 가고 돌아왔다. 헤드랜턴을 휴대용 충전기에 연결하고 나서야 걷기 시작했다. 혼자 캄캄한 곳을 걷는 것은 무서웠다. 파도는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늘과 바다 색이 같아 마치 쓰나미처럼 보였다.
아침이 되니 스마트시계가 모닝리포트를 보내왔다. 맨날 ‘휴식요망’을 외치던 녀석이 오늘은 회복이 잘 됐다고 했다.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스마트시계가 그렇다고 해서인지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바닷가 길은 허접한 나무 데크길이 대부분이었다. 살짝씩 움직이는 나무 발판 때문에 걷기에 좋지 않았다. 데크길이 무너진 구간에는 모래를 밟고 지나가야 했다. 다리를 다친 것은 이때였다. 발이 푹푹 들어가는 모래 위를 힘을 주어 걷다가 왼쪽 다리에 통증이 올라왔다. 그래도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니 잠을 설친 피로가 올라오며 다리의 통증도 심해졌다. 쥐가 날 것 같아 다리를 마사지했는데 그게 실수였는지 다리 전체에 통증이 번졌다. 억지로 3킬로미터 정도는 걸었는데 결국 왼쪽 발을 디딜 수가 없는 상태까지 되었다.
화딱지가 났다. 잠을 못 자게 만든 알베르게와 아기 엄마에게 화가 났다. 무엇보다 밤마다 발의 통증을 느끼면서 다들 그러면서 걸으려니 생각하고 넘긴 나 자신에게 제일 화딱지가 났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주위에는 행인 한 명이 없었다. 다행히 얼마 후 차 한 대가 지나갔다. 운전자에게 다리를 다쳤는데 마을까지 태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운전자가 흔쾌히 태워준 것도 모자라 알베르게 앞까지 데려다줬다. 덕분에 무사히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내륙길로 이동할 수 있는 지점이 나온다. 바닷가길과는 진짜 작별이다.
휴식 요망
D+20 포르투갈길 20일 차
루트 :Vila do Conde-Esposende (히치하이킹 제외 약 25km)
순례길에는 ‘까미노 엔젤(Camino Angel, 길의 천사)‘이 존재한다. 순례자들이 길을 잃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이들을 칭하는 말이다. 며칠 전 다리에 부상을 입은 후 며칠 쉬어가기 위해 호스텔을 찾았다. 그리고 까미노천사를 만나는 기적을 만났다. 건물 전체에 객실로 가득한 호스텔에서, 하필 나에게 배정된 방에, 하필 부상을 당한 이 시기에, 하필 전문물리치료사와 방을 쓰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전문물리치료사가 정말 친절하게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마사지치료를 밤새 해준다면 어찌 천사를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순례길에는 언제나 까미노엔젤이 함께했다. 차도 옆을 걸어갈 때면 운전자들이 경쾌한 리듬으로 경적을 울리며 엄지를 들어 올려 응원해 주었고, 길에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항상 큰 웃음과 함께 ’Bom Caminho‘(좋은 길 되세요)라며 나의 길을 축복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순례길을 벗어나면 휘파람을 불어 경로를 이탈했음을 알려주기도 하고 내가 길을 찾을 때까지 함께 걸어주기도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라도 멈추면 길을 잃은 줄 알고 달리던 차도 멈춰 서서 길을 알려주었다. 내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천 년이라는 순례길의 역사가 포르투갈 사람들의 DNA에 까미노 엔젤성이 흐르게 만든 것 같다는 꽤 그럴듯한 가설도 생겼다. 아마 그런 순수한 친절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포르투갈길이 상업화가 덜 된 탓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례자가 늘어난 포르토부터는 길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늘 드디어 국경을 넘어 산티아고 순례길의 나라 스페인에 도착한다. 산티아고까지 100킬로미터가 남았다.
부엔 까미노
D+26 포르투갈길 26일 차
️루트 : Paços-O Porriño (약 27km)
아침에 눈을 뜨니 순례자들이 모두 떠나 있었다. 자동적으로 나도 빨리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현재 내 상태에 집중해 보았다. 긴장되어 있나? 몸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지?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뭔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내 순례길이 ' 늦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한되어 있는 시간에 많은 것들을 하고 싶어 빨리 걸어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며칠 하루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으로 걸었다. 모두가 떠난 도미토리에서 눈을 떴을 때,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보다 앞선 도시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올 때, 나도 모르게 조급한 마음이 자꾸만 올라온다. 몸이 많이 지쳐서 빨리 이 길을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도 있다. 빨리 완주하고 푹 쉬자는 마음이 든다.
사실 지금 힘들면 지금 쉬어도 되는데 왜 굳이 산티아고에서 쉬고 싶을까. 어제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에게 이런 마음을 고백하다가 ' 산티아고에 꼭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데 '라고 말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에 ' 맞네. 그렇네.‘ 싶었다. 조용히 심호흡하며 다시 한번 나에게 그냥 하루를, 순간을 잘 보내는 데에 집중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걷다 보니 30킬로미터나 걸었다. 역시 마음이랑 몸은 따로 논다.
산티아고에 꼭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데
D+28 포르투갈길 28일 차
루트 : Mos - Pontevedra (약 3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