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3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맨다

by 김태라



앨리스는 당황하여 그녀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죠? 우리는 계속 이 나무 아래에 있잖아요! 모든 것이 그대로예요!'

‘물론이지’ 여왕이 말했다.

'그럼 어때야 하는데?'

‘이런, 우리나라에서는', 앨리스는 여전히 약간 헐떡거렸다.

'우리가 한 것처럼 오랫동안 아주 빨리 달렸다면, 일반적으로 다른 곳으로 가있어야 하죠.'

‘그곳은 아주 느린 나라구나!’ 여왕이 말했다.

‘이제, 여기 보다시피,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힘껏 달려야만 이곳에 겨우 머무를 수 있을 뿐이야. 만약 네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적어도 이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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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다 죽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잠시 쉬기 위해 들린 카페에 앉아 하늘을 보다 문득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덜어내야 할 한국에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떠올려봤다. 생각보다 덜어낼 것이 많지 않았다.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버릴 것이 많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산티아고에서 만난 한국인 아주머니의 대화가 생각났다. 정감 가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던 분이었다. 아주머니는 관광 중이셨는데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하자 놀라면서 어떻게 오기로 결정했는지 물으셨다. 익명의 만남이어서 그랬는지, 아주머니가 가진 특유한 편안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일기장에 쓰는 것보다 더 편하게 마음의 사소한 조각들을 꺼내놓았다. 나를 괴롭히던 순간들,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던 사람,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하던 사람, 부끄러웠던 상황,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는 마음 등 시시콜콜 지난 몇 년간 있었던 사소한 일들과 마음을 쏟아냈다. 아주머니는 조용히 내 얘기를 들으시다 한마디를 하셨다.


"잘 사는 거 정말 별 거 없는데, 그죠?"


왜인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했다. 아주머니의 표정, 말투, 그날의 공기, 그날의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내 마음속에 크게 남았다. 며칠 전 우연히 SNS에서 본 박찬호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지금 내가 가진 명예와 부는 한순간에 없어질 수 있고, 한순간에 없어지는 건 내가 아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지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는 것들, 내가 이루어 낸 것과 이루고 싶은 것들, 그것들이 나의 본질 아니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집으로부터 먼 곳으로 떠나와 이름이 없는 걷는 사람이 된 이후에도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시간을 만드는 미소,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감정, 세상을 느끼고 만들 수 있는 감각 등 나의 본질이자 가장 큰 자산은 내 깊은 내면 속에 있고 어디에 있어도 나와 함께 한다.


' 여기 지금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것들은 내가 아니리라.‘


이런 생각을 하다가 뮤지컬 <렌트>가 생각났다. 빌바오까지 남은 거리를 걸으며 오랜만에 뮤지컬 <렌트>의 사운드트랙을 들었다.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52만 5천6백 분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moments so dear 52만 5천6백 개의 소중한 순간들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52만 5천6백 분

How do you measure, measure a year? 당신은 1년을 어떻게 재나요?

In daylights, in sunsets 낮의 햇살로? 해 질 녘의 노을로?

In midnights, in cups of coffee 짙은 밤으로? 마신 커피잔으로?

In inches, in miles 인치로? 마일로?

In laughter, in strife 웃음으로? 다툼으로?

In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52만 5천6백 분

How do you measure a year in a life? 당신은 1년을 어떻게 재나요?


- ’Seasons Of Love’ 중 -



이렇게 살다 죽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D+50 북쪽길 8일 차

루트 :Larrabetzu-Bilbao(약 17km)








오늘은 괴테의 파우스트 오디오북을 들으며 걸었다. 파우스트를 선택한 건 한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오로지 세상을 달려왔을 뿐이다.’


한 교수는 ‘달리다’라는 표현을 근대적 속도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근대의 파우스트적 인간들의 추동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소설은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욕망과 속도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로 다가왔다.

2023년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달려왔을 뿐이다.’보다는 ‘액셀을 밟아왔을 뿐이다’가 더 어울리는 표현인 것 같다. 나는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가 내가 살아가야 하는 속도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빠르게 흘러가는 많은 풍경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에 항상 마음이 바쁘다. 방금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앞에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하니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있는 평화로워 보이는 산 봉우리를 동경한다.

이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했지만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지적갈증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시도까지 하는 파우스트. 현재의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나의 모습처럼 보였다.


“내가 그대의 욕망을 채워주겠다. 그러나 그 순간이 그대를 만족시킨다면 그대의 영혼은 나의 것이다. "


소설 속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걸고 계약을 제안한다. 그리고 계약의 내용처럼 파우스트가 더 욕망하게 하고 더 성취하게 돕는다. 소설 속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꽤나 상식적이고 인간적이기까지 했다. 그 악마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내 내면의 목소리와 닮아있었다.


나는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누구보다 빠르게 더 많이 성취한 사람들을 추앙하며 내가 되어야 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미디어는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들을 나열하며 내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행동을 제시한다. 다수는 성공한 소수의 언어와 행동을 반복생산한다. 나는 끊임없는 성취와 성장이 최고의 덕목인 세상에 살고 있다. 너무 당연하게도 그 세상에서 나는 완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50일 넘게 순례길을 걷고 있다. 차로 몇 분이면 갈 거리를 몇 시간에 걸쳐 걷는 속도로 살아보는 건 처음이다. 나에겐 너무나 당연하고 종교이던 자본주의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온 내 삶의 속도에 대한 질문이 든다. 나는 그 속도가 버겁다.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은 얼마나 걷고 어디에서 멈출지 고민한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살아갈 속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북쪽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순례길의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웠다. 자주 걸음을 멈춰 그 풍경을 충분히 마음에 담았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맨다

D+53 북쪽길 11일 차

루트 :Portugalete - Sámano (히치하이킹 4km 제외 약 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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