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유언은 독특하다. 독배로 사형당했다는 점에서 그는 십자가의 예수와 비교되곤 하는데, 기계인과 신인(神人)의 차이는 그들의 마지막 발언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마지막 말은 “이루어졌다”인데 반해, 소크라테스의 그것은 “빚을 갚아달라”였다. 한마디로 전자가 ‘이룬 자’라면 후자는 ‘빚진 자’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빚졌는가? 이를 알아보려면 그 유언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독배를 들이키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 삶과 죽음이 하나 된 그 절정에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
닭이라니. 말재주로 세상을 주름잡던 철학자의 마지막 말이 고작 이거라니. 개그도 아니고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이를 두고 죽기 직전 외상값을 기억해낸 소크라테스의 양심, 끝까지 관례를 지키려 한 철학자의 책임감 운운하는 문헌들이 있는데, 이런 해석들은 멸종 직전의 인간들이 얼마나 프로그램에 길들여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건 양심도 책임감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빚을 갚아달라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예찬한 것이다. 그가 빚을 졌다고 말한 대상은 의학의 신인데, 당시엔 병이 치료되면 그 신전에 닭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병을 고쳤다. 바로 죽음을 통해서. 그에겐 삶 자체가 감옥이자 질병이었기에 죽음만이 그 탈출구이며 치료제였다. 따라서 죽음으로 자신을 ‘살린’ 의학의 신에게 닭을 바치고 싶을 만큼 감사한다, 이런 얘기였다. 죽음 애호의 극치이자 정점에 이른 기계의 발언이라 하겠다.
이렇게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철학 기계로서 사명을 다했다.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기 직전까지 영육 분리 사상을 토해냈으니 말이다. 그것도 닭을 빌려와 재기발랄하게 표현했으니 고급 유머를 구사하는 그 지적 능력은 알아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병을 치료한 그는 알지 못했다. 죽음 애호 자체가 병이며, 그 병은 죽음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치유된 게 아니라 탈옥한 것이며, 삶이라는 감옥에서 도망친 것뿐이다.
앞서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했는데, 둘은 외관상 비슷한 방식으로 최후를 맞았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랐다. 예수는 죽음을 통해 삶에서 해방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 애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부정하는 자는 신성을 실현할 수 없다. 생명이 곧 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으로 도피한 게 아니라 죽음을 이용해 죽음을 넘어선 것이다. 예수에게도 그 죽음의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프로그램을 깼고 그렇게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룬 자’와 ‘빚진 자’의 차이이다.
본래 인간은 불멸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도 그랬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그 능력을 포기했다. 포기당했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영혼과 육체를 갈라놓는 프로그램이 작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서양철학사의 최고봉에 올라와 있는 그의 제자들은 이 프로그램에 따라 사상을 전개했고,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후대인들은 맹목적으로 죽음을 탐구하고 미화하며 지구를 검게 물들여 갔다.
죽음은 공포나 금기의 대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구나 예찬 거리도 아니다. 죽음은 생명력의 하락일 뿐이다. 생명력은 왜 하락하는가? 소크라테스의 독, 바로 영육의 분리 때문이다. 이는 신의 분열이다. 신은 영혼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영육이 전부 신이다. 생명의 신은 어디에나 있기에 자신을 전파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거나 타인을 설복시켜 에너지를 구걸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신을 믿었기에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후계자들이 필요했다. 본래 인간은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게끔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이는 육체와 영혼이 생명 속에 합일되었을 때 얘기다. 영혼과 육체가 따로 놀게 되면 그 틈새에 죽음이 스며들고 생명력이 떨어져 외부 에너지가 필요해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신은 타인을 끌어들였고 그 타자가 또 타자를 끌어들이며 결국 인류 전체를 도미노처럼 무너뜨렸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빚쟁이가 되었다. 그는 인류에게 거대한 닭을 빚졌다. 닭은 생명이다.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예찬한 철학의 시조보다 닭대가리를 가졌어도 푸드덕대는 생명체가 더 신성하다. 신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함께 죽은 신이 지구를 접수해 수천 년간 생명의 피를 빨며 번성했고, 그 결과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너덜너덜해진 채 서로 결별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 멸종의 전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또한 새 생명의 시작인 것을……. 인간이 사라지고 메타휴먼이 깨어났듯, 또 누가 알겠는가. 기계이자 불사신이 행하는 이 메타-철학을 통해 신이자 인간이자 기계인 새로운 존재가 새벽닭처럼 깨어나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