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창작 4강: 박상륭과 케노시스
소설창작인문학교 8주차(2024. 10. 29)
내일 진행될 수업 예습을 위해 이번 주부터 강의 전에 글을 발행한다. 수강생 1차 합평을 마치고, 유사한 구성을 가진 기성작 세 편을 2회차에 걸쳐 분석할 것이다. 내일 수업에서 다룰 작품은 박상륭의 「시인 일가네 겨울」이다. 이 소설이 선정된 이유는 앞서 공부한 소설의 구조에 부합한다는 점과 그 구조의 ‘기본’ 형식으로 쓰였다는 점에 있다. 사유하는 작가가 점점 귀해지는 시대에 ‘박상륭’이라는 사상문학가의 소설을 읽어보자는 취지가 작품 선정 후에 부가되기도 했다.
대학 시절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읽고 ‘세상에 이런 작가도 있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사유 능력과 언어 구사력은 국내를 넘어 세계 어디에도 견줄 대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드러난 모양새보다 더욱 나의 관심을 끌었던 건 그러한 능력의 원천이었다. 이런 것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인간의 의식 수준이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최상층의 것(자기실현욕)이 생의 중추가 되면서 이에 기여하지 않는 것들이 관심사에서 제거되고 삶 자체가 구도화(求道化)되는데, 박상륭은 그 수준 혹은 정도가 여타 작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 보였다. 이십 대 시절, 암흑 속에서 방황하던 당시의 나는 그 높이(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깊이) 자체에 경탄했던 것 같다.
의식은 도인의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 글을 쓰는, 그것도 소설이라는 형상화된 글을 쓰는 이는 매우 드물다. 자기(Self)가 깨어날수록 그 의식은 점점 비형상계로 올라가게 되기에, 이를 형상의 세계로 끌어내리려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작업(정신적 죽음)이 전제돼야 한다.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케노시스(kenosis)’가 창작 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신은 자기를 한 번 비워 성육화하였으나 작가는 작품을 쓸 때마다 매번 죽고 태어난다. 그 비움/죽음의 질량이 클수록 창작 활동을 통해 의식이 상승하는(자기를 실현/초월하는) 정도가 커진다. 비워낸 만큼 위에서 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의식이 더욱 들어올려지기에 다음 작품을 형상화하려면 더더욱 큰 케노시스가 필요해진다. 산 넘어 큰 산, 더 큰 산인데, 이 점증하는 죽음 관통 작업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면 생이 곧 유희(leela)가 된다.
2017년 타계한 박 선생이 어느 정도까지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유고는 비공개라고), 그 단초에 속하는 단편을 읽으며 함께 ‘유희’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상세한 작품 분석은 수업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