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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스스로 Sep 18. 2022

아빠의 발소리

스스로 프로젝트 1탄

아빠는 걸을 때면, 또박또박 소리가 났다. 군악대 출신인 아빠는 박자가 중요했다. 박자에 맞추어 걷는 아빠는 누군가의 노동으로 닦은, 반짝한 구두를 신으셨다. 아빠의 발소리가 더 또렷한 이유였다.


어느 날, 아빠는 사람들과 다른 박자로 삶을 살겠다 선언했다. 남들이 한참 노동할 때, 직장을 내려놓으셨다. 아빠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집 안에 가득 쌓아놓고 읽으며 지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다녔고, 열혈남아로 삶을 살았다. 아빠는 점점 박자를 놓친 어색한 발소리를 내며 걸었다. 흥청망청한 발소리가 밤마다 들려왔다. 아빠의 생활이 삐끗거리면서, 우리 가족은 모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은 작은 점을 뚫고나와, 지금 여기까지 왔다. 


흩어진 가족들은 각자 박자에 맞춘 발소리를 내며  성실하게 살았다. 우리는 아빠를 탓하지 않았다. 아빠도 박자에 맞추어 걷는 삶을 뒤늦게 시작했다. 아빠는 남들이 직장에서 퇴직할 때, 노동을 시작하셨다. 아빠는 힘들고 외롭게  길을 걷고  걸었을 것이다. 늦은만큼 더 고통스러웠을 매일의 노동을 묵묵히 참았다. 우리 가족 모두 모여 살자 했지만, 아빠는 끝내 거절했다. 아빠는 우리에게 미안해했다. 가족들이 고생한 마음을 갚으려 했다. 노동을 하는 아빠는  바쁜 소리를 내며 걸었다.


나의 결혼식 때, 아빠와 나는 버진로드에 함께 섰다. 아빠는 나를 리드하며 걷기 시작했다. 왈츠 박자에 맞추어 걸어 입장했다. 아빠의 걸음은 나를 기다리는 남편과 하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점잖은 목사님은  '빨리 걸어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난 부끄러웠다. 그 모습이 찍힌 사진에는, 내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아빠는 그날을 회상하며, 난 그때에 뭔가 더 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말했다. 앙드레김 패션쇼처럼, 아빠와 내가 이마를 맞대고 하객을 향해 웃는 쇼를 연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가 결혼 전날 말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그 쇼는 우리 모두가 보지 못한 것이다. 역시 우리 아빠는 멋진 괴짜였고, 그 모습을 미워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 부끄러웠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이제는 아빠의 발소리는 느려졌고, 한 곳에 멈추어 있다. 아빠는 나의 결혼식 이후에, 병에 걸려 큰 수술을 받았다. 회복을 한 아빠는 70대 초반까지 건강하게 지내셨다. 매일 3시간 넘게 한 운동으로 아빠 몸에 다져진 식스팩을 한 번도 놓친 적 없이 건강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아빠는 점점 달라졌다.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이기 시작했다. 아빠는 기억을 잃어갔다. 아빠는 점점 제 나이를 찾아가는 모습으로 늙어갔고, 끝까지 혼자 살았다.

거동이 어려워진 아빠는 끝내, 요양원에서 살게 되었다. 휠체어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그곳에서 분주한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발소리를 잃어버렸다. 또박또박 걷는 아빠의 발소리를 나는 기억한다. 나의 그리운 아빠에게, 나의 글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낸다. @김스스로_게으름 불태우기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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