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희 May 01. 2021

말로는 부족할 때 나오는 말, '그냥'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란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예능처럼 보면서 남편은 치맥을, 나는 (아수운대로) 치콜을 하는 중이었다. 귀는 활짝 열어 두고, 입은 야무지게 닭날개를 공략하다가 난 약간 쑥스러운 정서를 한마디 문장에 담았다.


"여보, 나는 스님이 대중의 고민을 듣고 진심 어리게 야단치는 모습을 볼 때면 눈물이 나."

"왜?"

"뭐가 왜야?"

"왜 눈물이 나는데?"


 왜냐고? 왜냐니? 이미 눈물의 핵심 포인트인 '진심 어리게 야단치는 모습을 볼 때면' 이라는 문구로는 전달이 안된 게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찐한 커뮤니케이션을 도합 10년 간 한 우리도 이렇게 다른 별에 산다. 그 때문에 치킨과 맥주와 콜라와 함께하는 대화는 풍성해지고, 이 자리가 좀 더 재밌어진다.


 자신의 감정 늪에서 지독히도 허우적대는 중생에게, 그래서 어떤 말도 듣지 못하고 넋이 나가 있는 사람에게


"정신 좀 차려요!! 하나뿐인 소중한 내 인생을 그렇게 내팽개치지 말고!"


 일갈하시는 스님을 보며 마음이 동하는데, 이 마음의 메커니즘을 어떤 이유로, 어떻다고 표현을 해야 적절할 수 있을까.


 나는 사는 동안에 남이 털어놓는 어려움 앞에서 오직 순도 100% 상대의 행복을 위해 이야기를 들어준 게 과연 몇 번이나 될까. 정신 차리고 산 근 몇 년에 들어서야 그래 봤지, 올타임 인생으로 보자면 그 몇 번 마저도 희석되어 얼토당토, 가당치도 않다. 상대를 위해 듣는 것 같아도 깊숙이 들여다보면 기분이 환기된 상대방과 나와의 사이에서 이해타산을 위한 것은 예삿일이다. 예를 들면, 상대가 열을 내며 제삼자를 씹고 있고, 나는 그걸 경청하는 입장일 때, 그의 기분이 한시라도 빨리 나아져야 함께 지내는 '나의' 시간이 보다 편해질 테니... 하는 마음 같은 게 그렇다. 나를 위한 마음이 비록 전체의 일부긴 해도, 심연의 꿍꿍이는 부정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내 눈물의 출발은 '자신이 아닌 존재'를 향한 스님의 '순수성'으로부터 왔다. 그저 유일하게 바람이 있다면 질문자 스스로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 오로지 그 하나만을 기대하는 사람의 진심에 경외롭기까지 하다. 그런 깨끗한 아름다움이 언어라는 매개체로 공중에서 오갈 때, 눈물은 나도 모르게 그 강력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마음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내가 유난히 못됐거나 부족하다 생각지 않는다. 나 정도 수준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보통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런 세상에서 스님처럼 한량없는 마음을 마주하니 안도와 반가움의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현재는 그렇지만 스님과 같은 마음이 내가 나아가는 삶의 방향성이기에 더욱 뭉클하다.


 캐나다의 옐로나이프 같은 대자연에서 오로라를 관측한 사람들 이야기가, 오로라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얼굴에 번진다고 한다. 그런 감정과도 비슷하다. 한 개비 성냥을 그을 때처럼 저절로 번쩍 일어나는 마음.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마음을 살펴보고, 어떤 미사여구로 감정을 표현한다 해도 그 눈물이 나는 감정과는 어딘가 오차가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 입에서는 이 마음을 대변할 단어가 이렇게 밖에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냥 눈물이 나지 뭐.


 나도 안다. 그냥도 어디까지나 언어의 하나일 뿐인 걸. 그러나 장황한 말보다 원초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이유 없음이 더 진실에 가까울 때. 가끔은 그게 통하는 뜨듯한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그냥을 잘 가려 쓰는 지혜가 빠지면 안 될 것이, 중대한 실수 앞에서 문책을 당할 때나 상대방이 눈 돌아가게 천불이 났을 때, 회피의 '그냥'을 썼다가는 불똥을 두배, 세배로 뒤집어쓸지 모르니 잘 구분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와 마스크 아로마 테라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