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프와 보라 그리고 나
요즘 서울은 30도에 육박하는 한여름 더위가 기세를 부리다가도 별안간 비를 추적추적 내리붓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존재감을 떨친다. 아름다운 사계가 자랑인 한반도인데 소문대로 아열대 기후화가 되는 건가? 섭섭해, 정도로는 표현이 아쉽고 애석한 마음이다.
그날도 그런 오후였다. 오전 내 있던 비구름이 걷히고 유난히도 하늘이 맑은 날. 쾌적한 날씨로구나! 우리 부부는 돌프에게 산책 겸 운동을 시켜주기로 하고 발걸음도 발랄하게 밖을 나섰다.
그런데, 와! 심각한 착각임을 금세 깨닫는다. 원래 다니던 코스를 반에 반 바퀴도 돌지 못했는데 돌프 따라 우리 둘의 혓바닥도 턱밑까지 내려오게 생겼다. 피부에 스치는 단어는 찜통더위 또는 불볕더위. 산책은 고사하고 열 걸음도 못 걷겠다. 우리는 백기를 흔들며 서둘러 근처 공원의 가장 시원한 곳을 찾아 앉기로 했다. 눈이 시릴 만큼 쨍쨍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공원 속, 벤치가 있는 정자 밑 네모진 그늘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
고요히 각자의 놀란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3인조. 축 늘어진 인간 둘과 개 하나가 시원한 정자 밑에서 한 숨을 고른다.
그렇게 10분이나 흘렀을까? 옆을 돌아보니 우리 곁으로 한 손님이 찾아와 있다. 공원에 들어올 때 분명 못 보았는데 어디서 온 걸까? 네 발 달린 자그마한 자전거 위에 올라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물끄러미 이 쪽을 바라보는 앙증맞은 꼬마 손님. 침착한 모습이 내 고정관념 속 '어린이'라는 이미지와 상반되며 특히 더 귀엽게 다가왔다. 아마도 우리 돌프를 가까이 보고 싶어 다가온 눈치였다. 잠시 그녀가 먼저 입을 떼기를 기다려주니 이렇게 묻는다.
"얘는 푸들이에요?"
"응, 얘는 푸들이야."
"이름이 뭐예요?"
"돌프야, 루돌프. 돌프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잠시 침묵과 함께 고민을 하는 듯한 꼬마 손님. 무슨 생각을 곱씹는지 잘 모르겠다. 만져보고 싶어 하는 거겠지? 그러나 그녀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겨간 질문을 토스한다.
"그런데 왜 마스크 안 썼어요?"
워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을 덮은 깜찍한 어린이용 마스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더위에 호흡 곤란이 올 것만 같은 나와 남편은 근방에 사람이 없다는 단견으로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있었던 거다. 어린이에게 본보기를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꼴인가!! 나는 혹시라도 어른에 대한 오해가 생길까,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 할지 모를 만큼 순간 몹시 당황했다. 그런 나와 달리 남편이 턱에 있던 마스크를 스르륵 끌어올린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손에 있던 마스크를 얼른 쓰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 이모가 더워서 깜빡했네. 미안해!"
다행히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다음 궁금증들을 해소해 나갔다. 돌프의 나이와 왜 그의 이름이 루돌프인지를 물었다. 그 이름은 누가 지었고, 돌프의 하얀 이빨은 왜 이리 작은지, 털이 왜 이렇게 꼬불꼬불한지도 물었다. 답을 차례로 해주고 나서 나도 그녀에게 몇 가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여섯 살 유치원 생이고 이름은 '보라'라는 것. 보라는 명랑하고 똑 부러지게 우리와 친해지더니 살금살금 돌프를 만지기 시작했다. 돌프도 싫지 않은지 보라와 눈을 맞췄다. 보라의 고사리 같은 손을 허락해줬다. 제법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그러나 내가 방심하는 사이, 그녀는 또 한 번의 직언으로 나를 들었다 놨다 했다.
"돌프한테 이상한 냄새가 나요. 물고기 냄새가 나요."
악. 이번에는 웃음이 터졌다. 보통 돌프는 한 달에 한번 미용실을 가는데 이번 달에만 특별히 한 달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말은 돌프가 목욕한 지 제법 됐다는 뜻이 맞다. 그래서 보라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우리는 대번에 알았다. 보라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지 않아도 그 냄새 나도 맡고 있었는데 이모 뺨이 어쩐지 붉어지는 느낌이구나! 물고기라니, 너무 신박해. 강아지에게 나는 특유의 냄새가 보라에겐 비린내처럼 느껴졌나 보다.
앉아만 있고 보라가 계속 조물조물거리니 돌프도 좀이 쑤신가 보다. 자꾸 벤치 아래로 뛰어 내려가려 한다. 나는 보라에게 돌프와 산책하는 것을 제안하고는 셋이 같이 공원을 걸었다. 그리고 보라에게도 돌프 산책의 주체적인 참여자라는 느낌을 받게 해주고 싶었다. 돌프의 산책 줄을 보라에게 잠시 넘겨줘 보고 싶었다. 돌프 일에 있어서는 안전 제일주의인 돌프 엄마지만, 야무진 보라를 보아하니 괜찮을 것 같아 보라에게 의사를 물었다. 내 말에 화색을 하며 반기는 보라. 나는 허리를 숙이고 보라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이 손을 놓치면 돌프가 뛰어나가서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럼 우리가 너무 슬프겠지? 그러니까 꼭 잡아줘."
보라는 산책 내내 산책 줄을 꼭 쥐었다. 그 손이 너무 예뻐서 더위도 잠시 잊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보라에게 설명한 내 말이 그녀에게 겁을 준건 아닐까? 어딘가 미흡한 안내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을 마친 직후에도, 지금도 그렇다. 있는 그대로를 안내하는 것, 나는 대체로 이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그때 역시도 보라에게 솔직하게 설명을 해준 것이지만 왜인지 어린이가 듣기에 조금 더 부드럽고 편안한 설명이 있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라는 특성을 요즘 내 일상에서는 담을 일이 별로 없으니 더 그러기도 할 것이다.
돌프와 보라, 그 둘이 함께 걷고 뛰는 모습이 또래 친구같이 보였다.
남편이 이제 들어가자고 한다. 그때 마침 멀리에선 보라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보라를 불렀다. 그녀는 헐레벌떡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이대로 말도 없이 우리가 가버리면 보라가 놀랄 것 같아 잠시 기다리기로 한다. 엄마와의 긴 대화를 마치고 다시 환하게 달려오는 보라.
"엄마가 루돌프랑 더 놀아도 된대요."
음, 난처한 소식이다. 하지만 내가 난처한 티를 내면 혹시 보라가 동요되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료하게 말하는 게 낫겠다. 이별은 언제나 있는 거니까.
"돌프는 이제 더워서 집에 가려고 해. 보라, 다음에 돌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 줘야 해. 돌프한테 안녕해줄래?”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말이 뚝 끊긴 보라를 보며 큰일 났다 싶었는데, 갑자기 보라는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루돌프 안녕!"
"보라야 안녕. 다음에 또 만나."
어린이는 생각보다 사려가 깊다. 돌프에게 찾아온 여섯 살의 여자 사람 친구 보라. 돌프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그녀는 수박처럼 시원한 여름날의 달콤함으로 내게 남았다. 야무진 손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도 아른거린다.
보라랑 돌프랑 또 같이 놀고 싶다. (남편은 깍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