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에서 비롯된 관심과 노력
와인의 미묘함을 정교하게 감별해내는 직업이 소믈리에라면 돌프의 엄마인 나는 돌프가 내는 갖가지 소리를 구분하는 '돌믈리에'다. 다른 언어를 쓰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걸까.
돌프가 우리 가족의 새 식구가 되었을 때 이 집은 거의 절간이었다. 입 한 번을 뻥긋하지 않는 3개월 새끼 강아지의 과묵함과 그의 예민한 청각을 우려한 인간의 잠잠함이 합심해 자연스레 집안을 음소거 모드로 만든 것이다. 이 시간이 얼마간 이어지자 혹시 돌프가 짖지 못하는 건 아닐까..? 새끼 생명체를 돌보는 자라면 엷은 염려를 뭉개 뭉개 품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도심 속 절간에는 큰 탈 없이 시간이 흘렀다. 돌프도 처음 온 날보다 잠에서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움직임에는 점점 힘이 붙고 반경도 커졌다. 그런 그는 틈만 나면 자기를 둘러싼 울타리를 타올라 밖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를 했는데, 누가 푸들 아니랄까 봐 긴 다리로 척척 기어오르곤 꼭대기에 올라서서 자기 좀 구조해보라는 듯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귀여운 패기와는 달리 성과는 저조했다. 대탈출을 꿈꾸던 그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에 그치고야 말았다.
그의 실패가 그에겐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돌프와 나, 우리가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즈음. 그의 속사정을 쉽사리 눈치채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어느 날 무언가가 집안의 고요를 강하게 뚫고 나왔다. 얇고 높은 외마디 소리. 반복되는 탈출 실패로 울타리 안에서 답답했던 돌프가 밖에 있는 나를 쳐다보다 "꺙!" 하고 꽤나 큰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나와 남편은 돌프만큼이나 똥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너도 이 소리 들었어? 들었지?! 방금 루돌프 목소리 맞지?
방년 2.5세인 지금의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본인의 의사를 목소리에 실어 전한다. 짖지 못할까 걱정했던 과거의 마음이 민망할 정도다.
약!!
작은방에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저 쪽 안방에서 돌프가 "약"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 소리는 평소보다 두 톤 정도 높은 소리로 "꺙"과도 비슷한데 ㄲ처럼 묵직한 된 자음 소리보다는 가볍다. 꺙은 대체로 짜증을 어찌하지 못했을 때에 내뱉어지는 반면 "약"은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가닿도록 얇고 높은 소리로 퍼진다. 그리고 거기엔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청의 뉘앙스보다는 지시나 호통의 소리에 가깝다.
"엄마, 지금 나 혼자 침대에서 공 던지고 받기 놀이를 하다가 공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어. 그러니까 엄마 네가 와서 당장 공을 올려줘! 그리고 내가 재미있도록 이 놀이에 함께 참여해! 약!!"
안방에서 들리는 "약"의 목소리를 듣고 이번에도 또 그런가, 슬렁슬렁 가서 확인해보면 예외가 없다. 돌프는 '다운 독' 자세를 취한 채 바닥에 떨궈진 공과 쇤네를 끊임없이 번갈아 쳐다본다. '다운 독'이란 상체는 바닥에 붙을 만큼 숙이고, 엉덩이와 꼬리는 하늘로 높게 든 자세로 강아지들이 상대에게 놀자고 할 때 주로 취하는 자세이다. 번갈아 보는 건 자신에게 필요한 대상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고.
“예 예, 소인이 올려다 드립죠. 암만요.”
아웅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얌전한 척 앉아 "아웅" 하는 작은 소리를 낼 때는 두 가지다. 자신에게 밥을 달라는 것과 거실에 나가 놀자는 것.
"엄마가 지금 뭐 하고 있어서 내가 크게 소리를 낼 만한 처지는 아니라 큰 소리는 지를 수 없고, 간단히 내 입장 정도만 밝힐게. 당장 내 식탁으로 가서 나에게 맛있는 밥을 줘. 아웅"
약간의 앙탈과 애교가 섞인 소리로 "아웅"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왉, 웡, 앙, 으르르릉 등 돌프는 그의 방식대로 마음을 전하고, 나는 돌프의 소리와 행동, 표정을 관찰해서 경험적으로 의미를 이해한다.
쓰는 언어가 다른 우리는 어떻게 각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또 이해하게 된 걸까? 돌이켜보면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크게 애쓴 것이 없다. 그것이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에게 개엄마가 두 번째 경험이긴 해도 육아 세포를 재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강아지에 대해 다방면으로 공부하고 유튜브나 TV 방송도 보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막, 열심히, 나의 영혼을 갈아 넣는' 부류의 애는 쓴 적이 없다. 그와 내가 의사소통법이 다르니 함께 잘 살려면 배우고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 것 밖에는 없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돌프에게 '당연히' 관심을 갖는 것만큼이나 나는 타인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는 중일까? 누군가 마음을 표현했을지 모르고 나는 들었을지도 모른다. 들었지만 언어 습관이 달라서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살아온 방식이 달라서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부재가 한 몫을 했을 수 있다.
글의 흐름이 아기자기함에서 별안간 성찰로 이어지는 까닭은 헛헛한 소식들 때문이다. 요즘은 잊을만하면 자살 뉴스가 들려온다. 특히나 이번에는 열아홉과 열일곱이라는 비단결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다. 한 아이는 죽기 전 학업 성적으로 신변을 비관하는 문자를 친구에게 했다고도 들리고, 다른 아이는 주변 친구들의 극심한 괴롭힘에서 구해준 친구에게 고맙다고 전한 문자 이야기도 보인다. 세상이 먹먹하다.
나는 돌프와의 공존을 위해 그를 알기 위한 마음을 내고 고민을 한다. 말할 것도 없는 우리의 '다름'을 필연적으로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최대한 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을 보며 이해하려 한다. 물론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은 통한다. 마음이란 것이 내 의지대로 주무를 수는 없기에 돌프에게 대하는 순수함 만큼은 따라와 주지 못할지라도, 인식은 하고 있어야 한다. 대상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다름에 대한 보편성은 동등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타인의 마음을 소믈리에처럼 정성껏 이해하고 감별하여 그와 어울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꿈이다. 각각이 가진 소통의 다름을 깊이있게 받아들이고,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