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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희 May 11. 2021

강아지 모델, 돌프님 입장하십니다

강아지 모델의 진땀 빼는 화보 촬영

돌프는 우리 집의 정해인이다. 청초와 청량, 잘생쁨이 묻어나는 정해인 님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돌프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겼다. CF에서 푸라닭 치킨을 예쁘게도 뜯는 그분이 나올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 우리 돌프 나오네."


그러면 남편은 소파에 앉아 양 손 바삐 (언제 적)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면서 담담히 내뱉는다.


"돌프야, 니네 엄마는 아직도 개랑 사람이랑 구분을 못하나 봐."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는 남편의 건조한 눈이 좀 의심스럽다. (아닌가? 그렇게 되면 날 아내로 고른 그의 안목이 어떻게 되는 거지?) 좌우간에 그의 말에 실망할 필요 따윈 없다. 왜냐, 돌프의 꽃 미모가 엄마의 콩깍지만은 아니란 게 어느 정도 밝혀졌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이 우연히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캐스팅을 당한다면 우리 돌프는 코엑스에서 열린 펫 페어에 놀러 갔다가 애견 업체 대표님의 눈에 띄었다! 우리 부부와 돌프가 그 업체 부스에 방문했을 때, 현장은 애견 업계에서 한 가닥 하는 브랜드답게 상당히 분주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대표님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 분께서 저쪽부터 돌고래 소리를 해오며 반갑게 인사하셨다.


"혹시!! 돌프???"


돌프는 본인 계정을 가진 인스타 그래머다. 작년에 어떤 중국(놈)분께서 해킹을 하시는 바람에 (이..런..#$%..#@!#$) 소중한 1년의 추억은 날아갔지만, 당시 돌프의 계정을 팔로우하던 업체 대표님이 대번에 돌프를 알아보신 것이다. 너무 귀엽다고. 오늘 아침에 올라온 사진도 직원들과 보며 얘기했다고.


그 말을 들은 그때, 나는 참 희한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유치원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담당 교사를 처음 만난 상견례 자리 마냥 나는 우아해지고 싶었다. 돌프를 알아보고 게다가 예뻐해 주시다니! 달뜬 마음이었다. 이런 감정이 처음은 아니다. 동물 병원 원장 선생님에게 '보호자님이 관리를 잘하셨는지 돌프 다리가 튼튼하다'는 소견을 들을 때, 미용 선생님에게 '빗질을 잘해주셔서 엉킨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들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감사해요. 안녕하세요. 돌프 맞아요! 오늘 돌프 쿠션 같은 게 필요해서 보러 왔어요. 소파에서 하도 날다람쥐처럼 뛰어내려서 소파 밑에 깔아주려고요."


쿠션 판매도 판매지만 돌프를 알아보신 대표님과 직원들은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돌프를 다음 촬영 모델로 해도 될까요?"


그때 돌프는 만 1세가 채 되기 전이었다. 이토록 산만한 주의력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도 싶었지만 우리 가족에게 즐거운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평소 잘 사용하고 팬심 가득하던 브랜드라 함께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옆에서 이 과정을 전부 듣고 있던 '돌프 아버지'는 내 마음과 같거나 혹은 더하면 더했던 게 분명하다. 남편은 난데없이 우리에게 쿠션 '두 개'가 필요하지 않냐는 사전에 논의 없던 말을 뱉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지금은 세상 어떤 말도 다 옳기에 맞장구를 치며 두 개를 깔아주면 훨씬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쿠션 두 개 값 20만원 어치를 시원하게 계산해 버렸다. 우리 남편은 본인 옷을 안 산지 몇 년이 넘은 짠돌이다. 패셔니스타 아주버님이 때때로 보내 주시는 안 입는 옷 한 보따리로 잘 살아가는 사람이다.



 

집에서 차로 1시간이나 걸리는 홍대 근처 촬영장에 도착하니 준비에 여념이 없는 대표님께서 맞아주셨다.


“돌프는 오늘도 예쁘네!!"


촬영 전문 스튜디오, 프로 사진작가, 그리고 돌프란 '신인 모델'을 발굴하신 업체의 대표님들. 이 분들께는 이게 생업이고, 그 사실 못지않은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면 우리에겐 이런 상황이 생전 처음이라는 것이다. 막상 낯선 시공간에 놓이니 사람 말로는 소통의 한계가 있는 내 자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며, 그들의 결과물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머리가 급속도로 하얘졌다. 다행히 아득해진 우리 부부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이 상황이 하루 이틀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끼리 모여 잠시 뭐라 뭐라 회의를 마치고는 슛에 들어간다고 했다. 나는 구석에서 얌전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애견 업계 종사자 다운 특유의 친화력을 선보이며 돌프와 친구가 됐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아기 돌프의 기분이 너무 업된 나머지 촬영에 집중하는 대신 예쁜 누나들과 놀고 싶어 자꾸 프레임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거다! 스튜디오는 3시간이라는 한정된 계약 시간이 있었고, 돌프에게 할당된 제품 촬영분의 콘티도 언뜻 보았던 것 같다. 막연했던 상상이 현실이 되면서 내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차라리 내가 개로 분장해서 찍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말을 어찌나 더럽게 안 듣던지 그 흔한 '앉아' 도 안 해줬다. 그나마 간식으로 연명하며 촬영을 이어갔는데 나중에는 그 마저도 안 통했다. 엄마 등에 나는 식은땀을 알 턱 없는 돌프는 무조건 신나게 뛰었다.


잠시 촬영을 끊은 대표님은 사진 작가님과 중간 점검을 했다.


"돌프 보호자님도 잠시 보실래요?"


 ...안 보고 싶었다. 작가님이 들이민 사진에는 돌프 대신 유령이 있었다. 형체가 제대로 나온 사진이 손에 꼽혔다.


쥐구멍만 찾은 장장 3시간의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드디어 해방되었다. 대표님께 미안한 마음에 겸연쩍은 인사를 건네고 발길을 돌리는데, 저기 들어오는 능숙한 애티튜드의 하얀 푸들과 까만 푸들은 또 뉘신지. 돌프가 찍지 않은 제품 몫을 찍을 모델들이었다. 그런데 능숙해 보이는 건 그 모델들 뿐이 아니었다. 그들의 엄마였다. 한 손엔 comb 브러시, 다른 손엔 slicker 브러시, 용도가 다른 빗을 하나씩 들고 한 컷 한 컷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프레임에 잠깐씩 들어가서 각종 포즈를 취하는 강아지들의 매무새를 단장하는 게 아닌가!


우리 세 식구는 집에 돌아와 각자 말없이 뻗었다. 그리고 자의와 타의로... 돌프에게 그 촬영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래도 돌프 스스로 밥값을 다 벌다니! 보수로는 계약 시 말씀해 주신 해당 브랜드의 포인트가 넉넉히 들어왔다.





그렇게 몇 주 뒤 나온 결과물 공개!






누나들 신나게 놀자!!!
견생은 한번 뿐이라고!!

엄마 난 모델 체질인가봐
열번도 더 하겠는데!!!



그리고 몇 안 되는 A컷


아고 예뻐라
오른발 휘날리며 마델 워킹
포효하는 아기 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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