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내꺼, 네 인생은 네꺼
지금은 아기보다 강아지가 좋다. 이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기와 강아지가 나에겐 둘 다 보호해야 할 여린 존재라서다. 그리고 또 하나, 오랜만에 만난 어른의 단골 멘트인
애는?
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기와 강아지, 내가 이 둘에게 느끼는 호감도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하는 소통이 좋다. 그런데 아기와 소통을 하는 행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의 액션과 내 피드백 사이에서 주고받아야 할 게 복잡하고도 역동적으로 얽혀있다. 응애응애, 으아앙! 아기의 시그널에 무덤덤한 편이라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나는 하나하나 자동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실수하진 않을까 융털마저, 뉴런마저 바짝 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아기를 대할 땐 에너지를 많이 끌어다 쓴다.
강아지는 심플하다. 복슬거리는 털로 마구 달려오는 강아지. 그는 자신이 예쁨 받기를 원한다. 나는 또 그 모습에 세상이 환해지며 비축해놓은 애정 전부를 아낌없이 준다. 그것으로 우리의 쌍방향 소통은 완성이다.
몰랐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내가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사람이다. 20대 때는 한 번에 여러 일을 착착한다고 꽤나 기특해했었다. 어디선가 본 건데, 한 번에 한 가지 이상 집중하는 건 집중을 안 한 거라는 뇌 분석이 있더라.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한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집중의 이동이 예민하게 휙휙 옮겨가는 것일 뿐이다. 그때는 그게 신이 날만큼 잘됐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민첩하게 집중을 이동시키는 잉여 에너지가 전보다 부족하거나 혹은 둔감한 것 같다. 그래서 무엇인가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게 훨씬 편안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래서일까? 아기를 보면 왠지 마음이 분주하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그러나 강아지를 보고 있자면 단순하게 날뛰는 내 마음이 꼬리 치는 강아지와 똑 닮았다.
우리 집에는 2.5세 푸들 돌프가 산다. 한 번은 집에 놀러 온 동생이 내가 강아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언니는 돌프가 매일 봐도 예뻐?”
그러게.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어쩐지 매일 봐도 새롭고, 날이 갈수록 예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강아지가 그의 턱이나 궁둥짝을 내 얼굴에 빠짝 붙인 채 잘 때가 있는데, 잠시 그 온기를 느끼고 있으면 감사한 마음이 절로 충전된다.
“돌프 잘 잤쩌영??”
강아지와 대화할 땐 혀가 반토막이 되는 게 댕댕계 제1원칙이자, 정상 반응이다.
엄마, 아빠나 시부모님이 보시면 몹시 서운해할 글일지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면, 현재 내 또래 여성들은 다양한 이유로 아이에 대한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서, 육아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둘이 사는 데 경제적으로도 빠듯한 세상이라서, 가장 단순한 이유로는 누구를 돌보는 게 귀찮아서. 아기와 강아지를 나란한 레벨로 논한다는 자체에 분노할 어르신이 계실지도 모른다. 혀를 끌끌 차는 의견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강아지도 아기도 선택과 책임 딱 그것이라 생각한다(물론 아기는 선택으로'만' 생기는 건 아니지만). 덧대어, 마음이란 상황에 닿으면 다 그 나름대로 적응하고 애정하며 흘러가는 법.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나을 것이고, 만나지 못할 인연이라면 또 그럴 것이다. 만나게 된다면 애정이 강아지에서 그리로 옮겨갈 테고, 마음이 둘로 나누어지는 건지, 둘이 넷으로 불어나는 건지는 가봐야 알 일이다.
더구나 내 캐릭터를 아는 주변인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이고, 팔불출 엄마나 되지 마."
그래,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지만 현재는 그렇다. 아기보다 강아지가 좋은 지금의 이 마음을 부정해야 할 필요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개 끌어안고 살면 어떡한대?
아기를 낳아야지
길 가는 어르신들의 드넓은 오지랖에도 웃어넘길 수 이유다. 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