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작이다
커다란 카트를 털털 밀며, 양평의 깊은 밤을 걷는다. 마지막이다. 준비까지 4일 내내 이 길은 매일 추웠지만 마음은 가로등 불빛처럼 포근했다. 이제 홍대 입구로 가지 않아도 된다니 믿기지 않는다. 관성처럼 또 큰 카트를 밀면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1시간 38분을 가야 할 것 같다.
집에 와 보풀이 잔뜩 일어나고 목이 늘어난 후줄근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동안 엄청난 폐허가 된 집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과 남편 모습이 애처롭다. 빨래를 돌리고 대외용 화장을 지운다. 붕 떠있던 나의 시야가 현실로 내려오니 방금 있었던 일이 진짜였나, 아니 꿈이었나 싶다. 멋진 작가님들과 책 이야기를 하고 비슷한 부스에 앉아서 나도 비슷한 멋진 작가님인 양 내 책을 이야기하고 판매했다. 쓰고 보니 뭔가 엄청난 일을 하고 온 게 맞는 것 같다.
행사 때는 오랜 연습생 생활을 마치고 인기 가요에서 이제 막 데뷔한 아이돌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젠 첫 콘서트를 막 마친 아이돌 같은 기분이 든다. (진짜 아이돌이 아니라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결과물로 만들어내고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좋다고 말해주고 응원해 주고…
저번 전시 때도 느꼈는데 꼭 사지 않아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하고 저릿한 게 있다.
굳이 먼 길을 와서 응원해 준 많은 분들이 있었다. 인스타로 계속 응원해 주시던 작가님들이 오시기도 하고, 복지관 강사님, 밑미로 알게 된 분들도 와서 책을 사주셨다.
가족들도 많이 왔다. 친정 부모님도 오시고, 남편과 어머니, 아이들도 왔다. 봄이는 그날 엄마 책 전시하는 거 본 게 재밌었다고 했다. 나무는 낮잠을 못 자 인사불성으로 와서 엄마 책은 봤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사촌동생이 ‘누나, 샐러드 사갈까?’라고 전화가 왔다. 그때 난 집에서 냉이 구별법 칼질을 하고 있었다. 다른 책들 구경하고 있으랬더니 책에는 관심이 없어서.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 책을 사갔다.
준 가족인 사람들도 왔는데 남편친구오빠는 선물용이라고 내 책도 몇 권이나 사고 우리 부스에서 최고 결제금액을 달성했다. 뭐가 빠졌다고 더 산다기에 그만 좀 사라고 했다. 우리 집 단골 숙박 가족은 예쁜 꽃다발을 주고 저녁에 홍대 맛집에서 같이 밥도 먹었다.(내 책엔 별로 관심 없는 것 같았다)
PDS 단톡방에서도 와주셨다. 동네 산책하다가 서울행 버스가 오는데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아서 급 잡아타고 오셨다고 했다. 한 분 한 분 모두 감동이고 정말 감사했다.
와글이 아니었으면 첫 책은 나올 수 없었다. 은혜로운 기한 속에서 서로를 응원하면서 책을 완성했다. 각자의 역할로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을 준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 날 우리 팀 책을 서로 플렉스(?)하는 시간이 있었다. 집에 가며 읽는데 뭉클했다. 나는 마침내 동료가 아닌 독자가, 팬이 되었다.
첫 책, 첫 페어 참여… 양평역 가로등 아래서 털털털 걸으며 생각한 건데, 내 삶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 계획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유가 있어 태어났고 지어진 대로 쓰일 데가 있었다. 내 불안과 두려움까지도. 우리 집 계단에 줄지어 선 책들도 이유가 있어 태어났고 쓰일 데가 있다. 누군가 꼭 필요한 한 사람에게 내 글이 닿을 거라 믿는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