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한 줄기의 의미
폴란드행이 결정되고 난 후, 바다를 건너는 이사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아직 날짜도 정해지지 않은 이사를 미리 걱정했다. 비단 이사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세상 모든 걱정을 혼자 싸안고 있는 것처럼 매사에 나는 그러했다. 장밋빛 미래와 희망을 상상하며 설렘에 눈을 빛내기보다는,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와 당황으로 맞닥뜨릴 그 모든 빈 공간들을 두려움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이 대부분 그러했다는 것, 그리고 새롭게 마주하는 세상을 낯설고 두렵게 여기며 살아온 나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불안이 큰 성향의 엄마는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맞닥뜨릴 상황을 최대한 살피고, 신체적, 정서적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엄마 역할의 전부인 것처럼 나는 안정을 추구하는 엄마였다. 그런 내가 폴란드행을 결심하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중학생인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서도 어마어마한 결단이 필요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리해야 할 짐 중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문제 중 하나는 어항에 키우고 있는 생명체였다. 아이들 유아기 때부터 키우고 있는 구피들은 번식력이 왕성해서 벌써 몇 대에 걸쳐 우리 집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커가면서 물고기에서 관심이 멀어진 아이들 대신 이제는 내가 더 물고기 들여다보는 재미에 빠졌는데, 새끼를 먹어치우는 성어들 때문에 치어들은 따로 분리해서 치어통에 올망졸망 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알비노가 한 마리 태어났는데, 1mm도 안 되는 눈이지만 분명 검정이 아니었다. 새하얀 몸통에 눈이 흰색인지, 붉은색인지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는데, 아이는 어서 키워 확인해야겠다고 했다. 때마침 구피를 나눔 받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몽땅 넘기려고 보니, 아이는 이사 가는 그때까지 아기 알비노 구피를 조금이라도 더 키워보고 싶다고 했다.
<구피 성어들을 나눔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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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성어들은 몽땅 나눔 해 주고, 작은 치어통에 있던 아기 구피들을 그보다 열 배는 더 큰 어항에 풀어놓았다. 큰 어항 속에 들어있던 작은 치어통이었으니, 작은 물에서 놀던 아기들이 울타리 너머 큰 물에서 놀게 된 것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물고기에게 밥을 주면서, 타인의 감정을 내 감정인 듯 공감하는 나는 여기서 물고기에게도 감정이입을 한다.
'여긴 어디지? 창밖으로 보이던 게 이거였구나. 내가 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네. 더 큰 세상이 있었구나.'
처음 큰 물에 떨어진 아기 구피들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더 넓은 공간에 놓이고 보니, 여기에는 수초와 자갈도 있고, 처음 보는 뽀골뽀골 공기방울 기둥도 있다. 노닐다가 밥을 먹으러 수면까지 헤엄쳐 올라가야 하는 거리도 훨씬 멀어졌고, 물살도 더 세서 헤엄치는 속도도 더 느린 것 같다. 방향만 바꿔도 바로 옆에 친구가 보였던 예전 세상과 달리, 한참을 헤엄쳐 가야 친구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물고기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하루에 한두 번씩 밥 주는 생활을 이어갔다.
2~3주쯤 지난 어느 날, 그날도 물고기 밥을 주고, 제일 작은 알비노 녀석도 잘 먹고 있는지 관찰하다가 보니, 그중 큰 녀석들에게서 무늬가 생긴 것이 보였다. 치어들이 크는 데에는 항상 시간이 꽤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부쩍 커있었던 것. 더 넓은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 성장 속도도 더 빨라지는 걸까? 그러고 보니 밥 먹으러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도 처음보다 가뿐해 보였고, 넓은 물속 구석구석을 헤엄쳐 다니는 녀석들의 아우라에서도 이제 어색함은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정말, 내가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한 것이 아니다. 물고기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불현듯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어항과 폴란드를 연결 짓는다. 내 아이들도, 아니 우리 가족도 폴란드라는 더 넓은 세상에 가면 이와 같겠지. 처음에는 눈 동그랗게 뜨고, 밥을 먹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모든 것에 낯설어하겠지. 그러나 하루를 살아내고, 그다음 또 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어느새 부쩍 자라고 성장해서 자기만의 무늬를 만들어 내겠지.
아직은 알비노 구피의 눈이 흰색인지, 빨강인지, 그 눈으로 세상이 보이긴 하는 건지 알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더 넓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헤엄쳐 다니다 보면 다른 구피들과는 색다른 눈을(빨강 또는 흰색 아니면 상상 이상의 색?) 반짝이며 넓은 그 세상을 누비고 다니겠지?
내 아이들이 자기만의 색을 드러내는 날을 상상해 본다. 내가 알고 있는 여기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온몸으로 부딪혀 깨달으며 그 넓은 세상을 두루두루 헤엄쳐 다닐 아이들과 우리 가족을 상상해 본다. 지금까지는 나와 우리 가족의 5년 후, 10년 후가 대강 어떤 모습일지 떠올릴 수 있었다면, 이제는 우리 가족의 미래 모습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전혀 예측 불가능한, 말 그대로 오로지 상상의 모습인 것이다. 예상치가 없다는 사실, 나의 불안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가 없다는 그 명백한 사실은 한편으로, 내 상상의 바운더리 이상의 다른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치를 넘어서는 어떤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자, 불안의 먹구름 한가운데서 가느다란 설렘 한 줄기가 보인다.
그 가능성, 가느다란 설렘 하나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다. 불안의 먹구름이 하늘 끝까지 이어진 듯한 기분을 두렵게만 느끼던 과거와는 달리, 그 아득함 한가운데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을 수 있게 된 나는 뭔가 한 단계 성장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먹구름 위에는 항상 빛나고 있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밝은 빛은 실체 없는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 그 뒤엔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왜 망각하고 있었을까. 한 줄기 빛을 본다는 것, 가능성과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그 뒤에 거대한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지 않을까.
큰 물에서 부쩍 자라난 구피들을 최종적으로 당근을 통해 이웃에게 나눔 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이주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좀 더 큰 물이 아니라 이번엔 아예 다른 별로 이주한 구피들은 다시 한번 어리둥절했을 것이지만 잘 적응해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이번엔 내 차례다. 더 큰 물로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다른 별로 이주를 앞두고 있는 듯한 나는, 지금껏 있는 줄도 몰랐던 얇은 막 하나를 찢어내고 그 바깥으로 나가려는 경계에 섰다.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글로도 풀어냈던 <당근대작전>은, 내 주변을 크게 한번 흔들어 적체되어 있던 물건들도 털어내고 더 넓은 물에서 노닐 내 마음속 공간도 널찍하게 확보하게 했다. 물건을 정리하는 동시에 지난 내 삶과 연결되어 있던 내 감정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 나의 가치관 등을 찬찬히 꺼내 들고 한 번씩 윤이 나게 닦아 가지런히 엮어 두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이 맞닥뜨릴 미래가, 이제는 더 이상 불안과 두려움의 색으로만 보이진 않는다. 좌충우돌 해외살이가 시작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더 단단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우리 가족은 더 단단해지고, 더 발전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 좌충우돌의 이야기는 나를 또 브런치 앞에 앉게 할 것이다.
coming soon!
[바르샤바 다이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