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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돈, 돈, 돈

by 김글인

돈이라는 건 정말 사람 마음을 들었다놨다하는 존재다. 나는 결코 당근 장사꾼이 되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우리 가족을 따라 머나먼 유럽까지 함께하지 못할, 그래서 국내이사보다 훨씬 과감하게 버려질 운명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다. 좀더 솔직해지자. 아깝게 버려지는 물건들에서 내가 느낀 죄책감을 덜어보고자 한 것이었다.


만원, 오천 원으로 시작한 것이 5만원, 10만원이 되어갈 즈음이었던가, 온라인계좌 한 곳에 당근 거래로 받은 돈을 모아보기로 했다. 계좌 하나에 고정적으로 받되, 당근페이로 받은 금액은 나중에 한번에 출금하면 된다. 현금을 휴대하기보다는 카드나 이체가 편한 시대니, 계좌이체가 대부분이긴 했다. 거래내역은 얼굴 딱 한 번 본 사람들의 이름으로 착착 쌓여갔다. 오천 원, 만원, 가끔은 2만 원, 3만 원도 있었다. 비대면 거래도 생각보다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계좌이체나 당근페이로 거래하는 경우가 많은 건 당연했는데, 이런 온라인 계좌 사용이 자유로웠기에 비대면 거래가 많아진다는 점에서 서로 선순환하며 거래 방식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금으로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장사라곤 해본 적 없는 내가 당근 거래하며 돈을 건내받는 게 처음에는 어찌나 어색하던지. 돈을 건내는 모습도 참으로 다양하다. 미리 주머니에 해당금액을 준비해 둔건지, 외투 주머니에서 손을 쑥 꺼내서 정확한 금액을 주는 사람도 있고, 품에서 반지갑을 꺼내서 현금을 꺼내서 주는 사람도 있다. 반지갑은 주로 5,60대 남자인데, 내리지 않고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물건과 물건값을 주고받는 상황과 겹치면서 유쾌하지 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인상은 30대 여자분이었는데, 미리 2만원을 넣어온 빳빳한 봉투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미는 것이었다. 돈을 건내는 모습에서도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 결정되는 것을 당근 거래를 통해서 느꼈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돈을 내는 구매만 해왔지, 돈을 받는 판매를 해본 적 없었기에 이것은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집에서 물건 정리하느라 후줄근한 차림으로 있다가 거래하러 나갈 때 휙 걸쳐 입는 외투 주머니엔, 천원짜리 다섯장, 만원짜리 한 장, 오천원짜리 한장이 자꾸 쌓여갔다. 그래서 현금을 받은 경우에는 그 때마다 다른 내 계좌에서 지정해둔 계좌로 해당 금액을 입금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출납 장부를 만들겠다는 건데, 이 당근 장부는 입금만 있다. 카드 이용 내역에선 날짜별로 지출한 금액이 줄줄이 달렸다면, 이 장부에는 5천원, 만 원 입금된 금액이 계속 늘어났다.



돈, 돈, 돈!




"얘들아, 당근해서 우리 치킨사먹자!"


버리는 데도 비용이 드는 세상이므로 처음에는 내 비용을 덜어주는 것에 만족했던 나였기에, 치킨 값이라도 남기면 감지덕지라고 여겼더랬다. 그런데 본격적인 당근대작전 4주차가 되니, 거래완료 건수가 50건 이상, 당근 계좌 잔고는 60만원에 달했다. 이거 치킨 한 마리가 아니라 고급 레스토랑에 가야겠는걸? 치킨값이라도 벌자 했던 것이 이만큼이나 되고 보니, 중고 거래로 돈을 번다는 사람들이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물건을 선별하고, 사진을 찍고, 거래글을 올리고, 여러 사람과 문의하고, 물건을 교환했던 50건의 내 수고로움이 매우 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노동이다. 밖에서 벌어오는 돈이 아니라, 우리집에서 돈이 줄줄 새나갈 틈새를 막아 돈을 버는 노동.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맞벌이 가정과 홑벌이 가정의 숨은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가정 밖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맞벌이가 훨씬 많지만, 홑벌이 가정은 외식을 줄이거나, 가성비 높은 소비 방법을 찾는 시간적 여유, 그리고 이렇게 버려지는 것에서도 부수입을 내는 등 돈이 새는 구멍을 막는 역할을 주부가 하고 있다는 것. 당근 장사꾼이 되어 벌어들인 돈으로 내 노동의 가치를 깨닫는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이쯤되니 나의 노동력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간다. 경제적인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 그래서 집에서 논다고 폄하받기도 하는 주부의 노동. 당근 거래를 통해서야 내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보게 되다니. 뭔가를 팔아야만 내 노동력을 돈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인가. 가족들의 정신적 안녕과 깨끗한 옷과 음식과 안락한 집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나의 노동이 왠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이 피해의식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자격지심인가. 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내 노동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말 한 켤레 당 2000원, 한 끼 식사 5000원 등으로 환산해야 하나. 외부에서 물질적 보상이 없는 내 노동력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는, 대기업에서 10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주부가 된 나에게 있어 어찌보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노동이라는 것은 왜 돈으로 환산되어야만 가치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자들에게도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이 필요하다고 했다. 스스로가 벌어들이는 일정한 소득이 있을 때 가장 나다울 수 있다는 그 의미가 깊게 와닿는 동시에 현실과의 괴리감에 몸을 떨었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가족 내에서의 내 위치와 역할을 다른 경제 생활과 맞바꿀 용기가 있는지도 스스로 의심스럽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돌봄의 역할과 돈을 버는 노동 사이에서 방황하며 고심하는 자아. 이것이 진정 서바이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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