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파도 그대로 느끼는 성취감
"그냥, 잘 안 돼도 꾸준하게 다니기만 해 봐."
내가 처음 수영을 시작한다는 소식에 친구가 말했었다.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하라고. 나는 정확히 그게 어려웠다. 잘 안 돼도 그냥 하는 배짱. 안 하면 안 했지, 하면 잘해야 했다. 남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는 말이 들려와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 만족하는 수준이어야 했다. 뜨개를 하다가 한참 아래에 틀린 부분을 발견했을 때를 예로 들어본다. 뜨개 세상에서의 매의 눈을 가진 나 외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실수인데도, 나는 다 풀어내고 틀린 부분을 고치고 다시 떠야 하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 흡족한 수준이어야 하는 데다, 그 수준 자체도 높은 편인 것이다.
그런 나의 성격을 꼼꼼한 완벽주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성격 덕분에 내가 수행하는 것들은 대부분 완성도가 높았고, 여러 성취의 경험도 쌓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다면 새로운 도전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던지 초심자의 미숙한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완벽주의자들에게 이 시기는 당연히 거쳐가는 중간지대가 아니라 미숙한 자신을 용납하기 어려운 두려운 시기인 것이다. 뭐든 평가의 대상이 되고, 실질적인 보상으로 이어져야만 하며,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세상에서 완벽주의자들은 우물 속에서 보이는 하늘이 좁을지언정 파랗게 보이는 하늘에 만족한다.
20년 만에 수영을 다시 시작하면서도 나의 마음속에는 두려운 특정 지점이 있었다. 발차기는 자신 있었다. 통통통 소리 내며 발등으로 차면 쭉쭉 나가는 게 느껴졌다. 킥판을 잡고 양팔을 번갈아 돌리는 연습도 충분히 했다. 다음 주쯤 되면 팔 돌리면서 호흡을 시키겠구나 짐작되는 시점이 오니, 그 두려움이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서서히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허리보다 얕은 유아풀에서 발차기 연습을 하던 때, 킥판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무서워요......"
주저하는 나를 보고 젊은 수영 선생님이 핀잔을 준다.
"이렇게 얕은 물인데....... 안 죽어요!"
20년 전의 그 느낌 그대로 고개를 돌려도 내 얼굴은 물속에 있었으니, 호흡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 바퀴를 돌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질 때마다 좌절감으로 몸부림쳤다. 그런데 그 좌절의 1주, 2주가 지나면서 점점 수면 밖으로 내 입이 봉긋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 기간 동안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자유형 영상을 열심히 물어다 날랐다. 수영 영상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아이들이 웃었다. "엄마, 수영 유튜브야? 진짜 열심히네!" 정말 좋은 세상이다. 20년 전,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인 2005년에 비하면 수영장 물속에서 맘대로 안 되는 내 몸뚱이를 영상 속의 물개 같은 사람들과 겹쳐 보면서 요리조리 생각해 보고 다음 강습 시간에 시도해 봐야지,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려운 3부 능선을 넘었다. 내 수영의 청사진을 떡 가로막고 있던 고개에 올라서니 뿌듯했다. 몸을 움직이는 운동에서 성취감을 맛보다니, 운동에 취미가 없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낯선 감정이었다. 학창 시절 공부나 직장 생활에서, 나의 역할이나 의무에서 느끼는 성취감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하기 싫지만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해야 하는 분야에서의 성취감은, 하기 싫은 마음을 다잡느라 지친 감정으로 상당 부분 상쇄된 후에 잔여 기쁨만이 잔물결로 찰싹이는 기분이랄까. 성취감이라는 큰 파도는 거대한 바위를 넘어오느라 발목만 간질이는 잔물결로 키를 낮추어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몸을 움직여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하며 '즐기는' 수영에서는 성취감이라는 큰 파도가 그 높이 그대로 내 마음에 큰 힘으로 부딪쳐왔다. 큰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낸 내 마음이 휘청할 정도로 얼얼한 기쁨, 이것이야말로 오롯이 나를 위한, 나의 의욕으로 즐긴 나만의 성과물이 아닌가.
눈앞에 보이는 산의 중턱쯤 올라, 저 꼭대기를 바라보며, 할 수 있겠는데? 하고 읊조리는 내가 보인다. 수영 배우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두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수영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내가 여기 있다. 나의 정체성 지도에 이제야 비로소 수영을 추가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