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세상에서의 영역표시
수영 강습 3개월 차, 주 3회 수영을 하고 있는 나는 아직 단벌신사, 아니 단벌 수영복이다. 수영 강습을 시작할 때, 내가 고른 수영복은 짙은 카키색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수영을 제안했던 언니는 허벅지까지 덮이는 반신수영복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20대 때 잠깐이나마 수영을 해본 나는 알고 있었다. 수영을 처음 시작하는 초심자들이 남들 앞에서 헐벗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소심한 마음을 말이다.
"언니, 부끄러운 건 잠깐이더라. 어차피 물속에 들어가면 보이지도 않고, 다들 자기 수영하느라 보지도 않아. 기본 강습용 수영복으로 사야 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이 둘을 낳고 20대보다 훨씬 불어난 몸매의 나도 수영복 앞에서 움츠러드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검정, 네이비는 피하고 싶어서 고른 게 카키색이었고, 언니는 검정에 어렴풋한 회색무늬가 점점이 있는, 무난한 수영복을 골랐다. 수영장에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6개의 레인 중 앞쪽 2 레인은 어두운 물결 일색이다. 너도나도 검정, 네이비를 포함한 어두운 수영복을 고르게 되는 보수적인 심리가 보편적인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일까 궁금해진다.
아이 낳은 40대 아줌마가 뱃살이 없으면 의리가 없는 거라고 본다. 집에서 수영복을 입어보는 언니를 보고 남편이 말했단다.
"복어가 나타났군?"
음, 그러고 보니 복어 무늬랑 비슷하긴 하다. 웃기면서도 그 남편한테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삐죽이 솟아 나온다.
자유형, 배영, 평영에 나를 얼마간 걸쳐놓고, 당분간 수영에 재미를 붙여볼 만하다 싶은 생각이 들고 보니, 상급자 레인에 있는 사람들의 화려한 수영복이 예뻐 보였다. 화려한 꽃무늬나 쨍한 색깔의 수영복이 예뻐 보이는 것은, 상급자 레인으로 갈수록 뚱뚱한 사람은 안 보이고 늘씬한 사람들만 보이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까? 내 몸무게는 여전히 변함이 없고, 물속에서 헉헉 거리는 날은 오히려 더 많이 먹는 것 같으니, 어느 세월에, 나도 늘씬이가 되긴 하려나. 예쁘고 화려한 수영복을 아이쇼핑하고 있다는 얘기를 옆사람에게 슬쩍했더니, 너도나도 "저도요!" 사람 심리가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새 수영복 언제 사실 거예요?"
옆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글쎄요. 아직 구경만 해봤어요. 용기 내서 화사한 수영복을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수영장에서는 머리스타일이나 패션취향, 화장은커녕 눈도 수경으로 가려지니, 주로 다른 사람의 수영복이랑 수모로 구분을 하게 된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은 면적의 맨살을 드러내놓고 만나다 보니, 다가가기도 친해지는 데도 시간이 더 걸리고, '그분 있잖아요. 카키색 수영복 입으신 분이요.' 이런 식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수영복으로 바꿔 입고 나타나면 시선이 집중되기 마련이고, 그 화려함이 감싸고 있는 내 몸이 민망하기는 다들 마찬가지인 우리는 아직 3개월 차 수린이었다.
"아! 수영복 새로 사면 서로 알려주기로 할까요? 같은 날 같이 개시해요!"
여럿이면 못할 것도 없지. 시선 분산 작전! 수영 강습에 70프로는 여자인 것도 반가운 일이다. 아니, 아니다. 여자들끼리의 시선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어느새 화려함을 꿈꾸고 있는 내가 문득 낯설다. 수영장 첫날의 부끄러움은 강습 3개월 사이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자유형 호흡에 대한 두려움과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나를 의심하던 소심쟁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쥐구멍을 파고 사라진 모양이다. 예쁘고 화사한 '새 수영복'에 대한 관심은 어떤 상징적인 표식처럼 느껴진다. 처음에 가졌던 두려움을 어느샌가 떨쳐낸 내가 새로운 개척지에 꽂아 표시한 내 영역의 첫 번째 깃발. 자고로 영역 표시는 눈에 잘 띄어야 하는 법, 화려한 수영복의 세계에서 과감하게 노닐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