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의 숲에서 숨을 고르다

사람에게서 도망쳐, 숲에게로

by Miyuki

작년 여름, 사람에게서 되도록 멀어지고 싶었다. 얼추 두 해 가까이 정든 도시를 떠나 차로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간 끝에, 30분도 넘는 거리에 있는 변두리 마을로 이사를 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였다.


짐을 풀던 날, 주인집 아주머니가 말했다.


걸어서 십 분쯤만 가면 큰 호수 공원이 나와요.
시간 되면 한 번 가봐요.


해가 뜨거워지기 전, 어느 이른 아침. 설렁설렁 동네를 벗어나 호수 공원 입구를 찾았다. 길가 옆으로 난 조그마한 숲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들어섰다.


내 키보다 두세 배는 훌쩍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조심스레 흐르는 개울물, 풀로 덮인 둔턱, 연두빛으로 가득한 풍경이 한데 어우러졌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비밀의 숲 같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길은 산책로처럼 평탄해졌고, 나무 사이로 걷기 좋게 길이 나 있었다. 숲에서 들리는 소리는 바람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서걱이는 내 발소리뿐. 인적은 없고, 오롯이 나 혼자뿐이었다.


어느 순간, 마법처럼 모든 게 정지되었다. 진공 속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시간이 멈춘 느낌이었다. 나는 멈춰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한 순간이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초록의 기운이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후로 나는 자주 그 숲을 찾았다. 어떤 날은 한없이 고요했고, 또 어떤 날은 바람이 잎사귀를 휘감으며 말을 걸어왔다. 걷다 보면 때때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 마법이 풀리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진공 같은 순간을 좇아 그곳으로 향했다.


혼자라는 것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일 때 더 온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록의 공간과 사색이 주는 충만함은 마음 한켠을 벅차오르게 했다.


니체는 매일 아침 숲속을 걸으며 사유했고, 그 사색의 걸음이 그의 철학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는 동안 떠오른다”고 말했다. 나 역시 걸으며 비로소 나를 마주했고, 길 위에서 비로소 고요하게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숲길을 걷는 동안에는 내 안의 소음이 하나둘 가라앉고, 남겨진 건 오직 ‘지금 여기’의 감각뿐이었다. 나무의 향기, 흙 내음, 바람의 손끝. 모든 것이 말 없이 나를 감쌌다.


사람에게 지쳐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지만, 매일 그 숲길을 걸으며 마음은 조금씩 너그러워졌다. 구구절절 누구에게 털어놓지 않아도 괜찮았다. 말보다 더 온전한 위로가, 나무의 그림자와 숲의 고요 속에 있었다.


그 비밀스러운 숲길을 지나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전에 없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살아야지.

숲은 마치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일도 오라”고.
그리고 “이 길을 걸으며, 조금 더 살아보라”고.


말 대신 나무의 몸짓과 바람의 숨결로 위로를 건네는 숲은, 내내 침묵 속에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존재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상처도, 후회도, 외로움도, 마치 흙으로 되돌아가듯 조용히 스며들었다.


혼자 걷는 길이지만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고, 아무 말 없이 곁에 있는 숲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듯 느껴졌다.


가장 깊은 대화는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받고 있다는 고요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그 숲이 알려주었다.


“숲은 말이 없지만,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게 한다.”
- 폴 틸리히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국밥 한 그릇의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