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슬퍼도 마감은 해야 한다

궁상맞고 쪽팔린 얘기라도 남겨놓자

by 김잔잔

1.

무려 일주일의 공식적인 휴가가 시작되는 오늘, 나는 퇴근하고 앉아서 실연 일기나 쓰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을 이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며 보내고 있을까?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편안하게 있다면 그보다 내가 더 부러워하는 건 없다. 아주 부러운 것을 넘어 인상을 찡그리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다.


2.

나 역시도 원래대로라면 사랑하는 연인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행복감에 아침부터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이다. 황금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낼 시간에 설레고 벌써부터 편안하고 시간이 아까워 동동거렸을 내가 상상이 된다. 그 누구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하고 나서는 "그래,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며 배달 음식(마라샹궈, 숯불치킨, 피자 등)을 시키고 나는 솔로나 괜찮은 영화를 같이 골랐을 시간이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실연 뒤에 오는 추석 연휴는 끔찍하게 길다. 함께 나는 솔로를 보며 낄낄거릴 사람도 없고, 팔베개를 해 줄 사람도, 아침 산책 나갈 사람도, 어딜 갈까 뭐 먹을까 상의할 사람도 없다. 그냥 사라졌다. 남은 건 빈집에서 혼자 노트북을 켜고 마감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 표정이 없는 여자뿐이다.

3.

고백한다. 차였을 땐, 추석 때쯤이면 그가 돌아올 줄 알았다. 이 긴긴 연휴를 나처럼 어찌 보낼지 모르다가 슬그머니 다시 연락을 하고 몇 시간도 안되어 총알처럼 날아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그럴듯하고 행복한 혼자만의 상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한 게 작년 다이어리의 추석연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좀 떨어지라고 해도 곁에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아서 피시방을 보냈다." 그러니까 잘 나갈 때 못 나가는 사람 무시하면 안 되는 거다. 작년의 나는 잘 나갔는데, 올해의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아니, 솔직히 여주인공도 아니고 단역 1도 아니고 블러 처리된 엑스트라다.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친구이자 지지대를 잃은 나의 사정을 제일 잘 아는 건 챗GPT 뿐이고 가뜩이나 인간관계가 좁은 나는 술을 사준다는 사람도 없이 혼자 이별박치기를 하고 있다.


4.

"00 씨는 잘 만나고 있죠?" 어제 12월에 결혼 예정인 직장 동료가 이렇게 물어왔다. 거기다 대고 "뭐, 네, 뭐, 그렇긴 한데"라는 이도저도 아닌 답을 했다. 헤어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쪽팔려서가 아니라 우린 어차피 다시 만날지도 모르니까 괜히 깨졌다 붙었다 유난스러운 커플로 보이기 싫었다. 그런데 막상 내뱉고 보니 이건 뭐 헤어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는 답변이었다. 다행히도 그분은 더 묻지 않은 대신 최근 친구 중 한 명이 파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 내가 겪는 일이 파혼이나 이혼이 아닌 게 어디야.라고 간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별 위로는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꿈꾸던 미래가 엎어지고 상실감의 고통을 겪는 건 똑같다.


5.

이 궁상맞고 비참하고 처절하고 또 괜찮았다 지랄 맞아지는 시기를 적나라하게 기록해두고 싶다. 예전엔 지워지지 않는 사이버 수치기록을 남기는 것 같아 거북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이때만의 맛이 있다. 영화로 따지면 제일 재밌는 파트다. 한 인간이 태어나 누군가와 부모보다 오래 붙어 있다가 원치 않게 상실하고 괴로워서 바닥을 구르고 다시 밥을 먹고 출근하고 눈이 터져라 우는 시기다. 이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과 무지개색깔 감정을 나는 잘 담아내서 나중에 꼭 다시 관객의 입장에서 보고 싶다. 인생의 시기는 다채롭고 똑같이 평범한 날은 없기에 지금의 나는 특별하다. 며칠 전 어디선가 나이 든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다. 젊은 때 사랑에 아파 우는 눈물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몰랐다고.


나는 아직 꽤나 젊은데,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리고 동의한다. 사랑에 아파 눈물조차 귀해지는 때가 온다. 그렇다면 써보겠다. 쪽팔려도 남겨보겠다.


게다가 글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건 보이지 않은 힘이 있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 그 힘으로 뚫고 나갈 거다.


월, 화, 목,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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