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나를 정의하는 두 가지 컬러
풀어지는 시기에는 느긋하게 지낸다. 마치 마른 꽃이 물속에서 점차 꽃잎을 펼치는 것처럼, 물을 머금은 공룡 모양 스펀지가 몇 배로 잔뜩 부푸는 것처럼, 조용히 시간을 느끼는 것이 최고의 강함이다.
요시모토 바나나 <도토리 자매> 中
퇴사하고 나서 무조건 나는 반바지만 입는다. 반바지가 모두 세탁기에 들어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그래서 오늘 난 긴바지를 입었고, 하필이면 어제까지 시원하다가 막 더워지기 시작해서 상대적 짜증은 더 컸다.) 그리고 코디에 대해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저번에 수업하다가 한 학생이 "근데 하리님은 저번이랑 왜 옷이 똑같아요?"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 날의 복장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사실 옷이 별로 없다. 몇 달 전까지 회사를 다니다 보니 정장용 바지가 그득하다. 그러나 그것은 쳐다도 보기 싫다.) 바지 뿐이랴? 신발의 굴레에서도 자유로워졌다. 회사에 가면 꼭 신어야 하는 게 구두였다. 구두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 구두를 신는 내 발이 문제였다. 내성발톱이었던 나는 구두를 신고 오랜 시간 있으면 발이 저려옴을 느꼈다. 그러나 회사에서 구두를 벗고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참아야 했다. 격식이 우선시된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신입사원 연수를 갔을 때, 샌들을 신고 가서 나를 비웃음 섞인 눈으로 쳐다보던 모든 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발톱이 아프다는 이유도 소용없었다. 그 때, 알았다. 아 회사란 곳에서는 내 개인의 사정도 중요하지만 전체와의 조화가 더 중요하구나. 전체가 경직된 분위기라면 나 역시도 그에 무조건 맞추어야 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나만 몰랐다는 듯이 어찌 보면 '돌출 행동'을 한 걸 보면 말이다.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회사의 복장 규정이 자율화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그 속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그런 선이 존재하면서 자율이란 말을 함부로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정장만 말고 캐주얼로 입고 오세요 라고 하면 될 걸 우리는 이제 자율과 창의성을 추구하는 곳이에요 라고 광고라도 하려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복장이 바꼈다고 해서 사고나 규율까지 예전과 달리 풀어지지 않는다. 뭐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다. 그 곳에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의 전언으로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하는데 지켜 볼 노릇이다.
확실히 회사를 나온 나는 이전에 비해 풀어진 것은 맞다. 오늘 같은 경우에도 편한 복장으로 룸메이트의 심부름을 하고, 10시 40분에 내 눈앞에 보이는 고깃집에 가서 냉면을 시켜 먹었다. 보통 10시 반에는 밥을 안 먹는다. 그런데 나는 먹고 싶어서 먹었다. 뭐 큰 이유가 필요한가? 풀어진 채로 살면서 내 본능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의 시간은 다른 이들의 시간보다 좀 더 길게 느껴진다. 느리게, 늘어지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나의 삶을 오롯이 편안하게만 살 수는 없다, 아니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사회적 존재인 내가 사회에서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한다. 농담삼아 백수가 좋다고 하지만, 백수가 되려고 회사를 나온 건 아니다. 매월 받는 월급만으로 부자가 되거나 성공하기 어려울 거란 계산이 나와서 그리고 내가 이끄는 내 삶을 살아 내고 싶어서 회사를 나온 거다. 주인은 주인이 될 만한 이유가 있다. 왕관을 쓴 자여, 무게를 견뎌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다른 누구보다 긴장하며 살고 있다. 나의 게으름은 곧 도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많이 글을 쓰고, 바쁘게 고민하고, 그 고민의 흔적을 또 다른 글에 담는다. 나는 그렇게 성장하고 내 나름의 방식대로 긴장 중이다.
나라는 스펀지가 매일 쓴 나의 글들을 물처럼 머금는다. 봇물 터지듯 쌓아둔 잠재력이 한 번에 터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 터질 지는 나도 모른다. 사람이 한 치 앞도 내다 보기 어려운데, 이런 성공은 거의 로또 1등을 점지받는 확률에 맞먹는 거 아닌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누구보다 집중하고 긴장하며 한다. 그럼 그 일에 대한 완성도는 어디다 내놔도 자신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조바심과 집중력은 다르다. 조바심을 내며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얼른 끝내야지만 직성이 풀린다. 물론 그들도 완성도에 신경을 쓰지만, 일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전 회사에서 일했을 때, 이런 마인드였다.) 집중력을 갖고 일하려면 그 일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당당히 글쓰기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닐 수 있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 하듯 양동이로 스펀지에 쏟아부을 채비를 끝마쳤다. 실제로 나는 매일 많은 글을 쓰며 '양치기' 훈련으로 나의 잠재력을 급속도로 끌어올리고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작은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제 존재감에 압도되려면 지금의 작은 발전에 기뻐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조금씩 바닥을 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게 더 기쁩니다. 이는 흡사 한 권의 책을 3대에 걸쳐 읽는 게 작가로서 더 기쁘다고 말하는 하루키 님의 생각과 어떤 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눈에 바로 보이는 결과 말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바닥을 다지며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제 브런치 조회 수 그래프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조회수가 높아 기쁜 건 어쩔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