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훔쳤다.

by 원성진 화가

커피숍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펼쳤다. "니체와 야스퍼스" 아무리 천천히 읽어도 책이 나를 재촉하지 않는 철학책이라 더 좋았다. 문장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생각은 굳이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활자들이 자꾸 흔들렸다. 물결처럼. 눈이 피곤한지, 마음이 먼저 지친 건지 알 수 없었다. 커피 향은 분명 따뜻한데 집중은 자꾸 흩어졌다.


한자리 건너, 옆 테이블에 앉은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성 두 분의 목소리가 유리창을 타고 흘러왔다. 생각보다 또렷했다. 여자 애는 이래야 된다느니, 남자 애는 저래야 한다느니. 오래된 공식 같은 말들이 커피 위 김처럼 가볍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책 속의 개념들보다 그 말들이 훨씬 생생하게 귀에 걸렸다.


그때부터 나는 독서를 멈추고 대화를 훔치기 시작했다. 눈은 활자를 더듬는 척했지만, 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고도 그들의 표정이 상상됐다. 고개를 끄덕이는 쪽, 커피잔을 괜히 만지작거리는 쪽.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말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불편해 보이는 얼굴들.


이야기는 점점 재미있어졌다. 재미있다는 말이 조금 가볍다면, 점점 깊어졌다고 해야 맞겠다. 말의 속도가 느려지고, 문장 끝이 흐려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중요한 이야기는 늘 그렇게 다뤄진다. 세상에 들키지 않으려는 듯, 혹은 스스로에게도 아직 확신이 없다는 듯.


그 순간부터 나는 미칠 듯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저렇게 낮추는 걸까. 사랑 이야기일까, 결혼일까, 아이일까, 아니면 그 모든 단어들 뒤에 숨어 있는 각자의 두려움일까. 귀는 바짝 세웠지만, 공기는 더 조용해졌고 말들은 커피숍의 소음 속으로 흩어졌다.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 컵 부딪히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가 방해꾼처럼 끼어들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대신 상상만 잔뜩 들었다. 듣지 못했기에 더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철학책의 문장들은 여전히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이 피곤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 질문들과 옆 테이블의 속삭임이 묘하게 겹쳐졌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게 되었는지.


책장을 넘기며 다시 창밖을 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입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역할들이 꼭 맞는지, 조금 큰지 작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커피는 이미 다 식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마저 이 공간의 일부처럼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읽은 철학책보다, 듣지 못한 그 대화가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예감과 함께.


작가님들도 이런 상황이 많았겠지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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