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동, 놀이터와 공원 사이
9월이 되면서 저녁 바람이 선선해졌다. 어떤 날은 입고 있던 여름옷을 살짝 여미게 만들기도 했지만, 내심 이 기분을 더 느끼고 싶어서 동네를 거닐다 작은 공원 의자에 앉았다. 공원이라고 하지만 낮에는 아이들이 신나게 떠들고 노는 놀이터이자, 밤이 되면 혼자 있고 싶은 어른들의 아지트가 되는 곳.
방이동, 그 안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이 구역에는 공원이라고 불리는 작은 놀이터가 3곳이 있다.
'몽촌공원, 곰말 어린이공원, 옛 동산 어린이 공원' 이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에 가까운 곳이다 (물론, 아이들 시선에서는 또래 친구들과 뛰어놀기에는 충분히 큰 세상일지 모른다)
나는 종종 이 작은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굳이 이곳을 지나쳐 가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이유는 늘 아스팔트로 된 딱딱한 길만 걷다가, 공원 바닥에 깔려 있는 고무 우레탄의 푹신함이 좋아서이다.
이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동안 내가 관절을 혹사시켰다는 죄책감이 들 정도로 이곳의 질감은 쿠션 깔창을 넣은 것처럼 편안하다. 동시에, 잠깐이긴 하지만 이곳을 걷거나 앉으면 왠지 모를 마음의 평화가 찾아드는 감정이다.
평일 늦은 오후 4시, 동네 꼬맹이들이 다 모여드는 시간이다. 이때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중간중간 고함을 치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 또한 신남이 묻어 나 있어서 시끄럽지가 않다. 화가 나서 악을 쓰는 금쪽이와는 결이 다르다. 간혹 말싸움을 지켜보면 나름 아는 어휘들을 활용하여 논리를 펼치지만 각자의 주장들이 내 눈엔 그저 귀엽게만 보일 뿐이다. 눈을 돌리면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부모님들의 표정을 보니 내심 걱정이 많아 보인다.
"한시도 눈 돌릴 틈이 없는 것이 육아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경로당이 함께 있는 공원
3개의 공원 중 한 곳이 집에서 불과 10초 거리에 있다. (뛰면 5초에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공원에는 경로당이 함께 운영되고 있는데, 종종 밖에 나와있는 어르신들이 아이들과 한데 얽혀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세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을 걸어가야 할 세대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이 공존하는 이곳.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 서 있는 느낌이랄까. 정확히는 어린 시절과 점점 멀어지고, 종착지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이건 세상의 이치니까.
고양이들이 사는 공원
옛 동산 어린이공원은 내가 이사오기 전부터 터를 잡고 살고 있는 고양이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길고양이들이지만 나름 동네 주민들이 지어준 이름이 있고 꽤나 사랑받으며 살고 있다.'어찌나 포동포동한지 길고양이 치고는 늘 잘 먹고사는 것 같다.' 만져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겨울 며칠 안 보이면 걱정스러운 마음에 들지만, 가끔 햇볕이 드는 날에는 다들 자리를 잡고 한 겨울 일광욕을 즐기는 걸 보면 내 걱정은 오지랖이었다.
사진에는 없지만 이곳에는 약 5 ~ 6마리의 고양이가 살아가고 있다. 개인주의자? 성향답게 각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말이다. 아마도, 처음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라 여기저기 모여든 녀석들 같다.
어쨌든, 나는 가끔 고양이들이 보고 싶으면 이 공원으로 오고는 한다. 물론 녀석들은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말이다.
늦가을에 만난 모기
돌고 돌아 이제야 본론이다. 더운 여름도 어느새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 조금 찾아온 느낌이다. 나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시원해서 앉았건만 종아리 부위에 갑작스러운 간지러움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모기가 물고 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여름엔 보이지 않던 모기들이 늦가을에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문득, 올해 여름이 너무 더워서 하다 못해 "모기도 더위를 피해서 가을에 외출 나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모기들도 피해자 입장일 것이다. 기후 변화가 모기들의 잘못은 아닐 테니 말이다.
가을이 지나가면
푸른 나뭇잎들은 하나둘씩 떨어지면서 공원의 공간 일부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시월. 밟으면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는 녀석들은 이제 더 이상 푸릇한 나뭇잎이 아니라 불에 잘 타는 건조한 낙엽이 된다.
가끔 텅 빈 의자에 앉아서 낙엽이 쓸리거나 부서지는 소리를 듣다 보면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또다시 한 달, 두 달이 지나면 갑자기 추워지겠지. 그러다 한 번쯤은 눈이 내릴 것이고. 방이동에서 맞이한 2025년도 이렇게 지나가겠지.
그렇게 늘 함께일 줄 알았던 '한 여름'과 한 걸음씩 이별을 준비 중이다. 안녕, 2025년 여름아. 그리고 가을까지도.
P.S
이번 글은 9월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나, 개인적으로 복잡한 한 달을 보내며 밀리고 밀려 10월 3일 개천절 날에 한국이 아닌 대만에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쓸 때는 여름과 이별을 준비하는 줄 알았으나, 대만에서 '다시 여름으로 시간 여행을 경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