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강의 요청이 많아 꽤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가히 제 2의 고향이라 할 만하다. 물론 오가는 길이 멀고 험하지만, 정 많고 리액션 좋은 부산 교육생들 덕분에 기분 이 좋아진다. 부산 출장을 가면 숙소는 주로 부산역 인근에 잡는다. 기차역과 가깝고, 부산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기도 편하다. 인근에 시장도 있고, 포장 마차까지 즐비한 거리에 재미 요소까지 더해진다. 게다가 호텔이며 모텔이 많아 숙소 선택의 폭도 넓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를 마치고 부산역 편의점 앞에서 조촐하게 맥주한잔 하고 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콘돔을 구매하는 남성분들이 많았다. 각자 취향에 따라 이런 저런 콘돔을 집어 들고 왠지 모르게 설레는(?) 표정으로 계산대로 향한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콘돔 하나 딸랑 들고 계산대로 가는 사람은 없다. 컵라면, 생수, 껌, 담배 등의 물건과 함께 계산대에 올려 논다. 왜 그랬을까? 대놓고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오래전 경험(?)에 비춰봤을때 ‘알바생이 나를 이상한 놈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부끄러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봤다. 그래서 굳이 안 사도 되는 다른 물건으로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레임 뒷면에 공존하는 부끄러움, 이것을 문제의식으로 시작된 재미난 기획이 바로 ‘먹지 마세요, 그곳에 양보하세요’ 시크릿 콘돔 기획이다. 일반 콘돔 포장지와 다르게 소스 포장지에 콘돔을 담아서, 외관상으로는 전혀 콘돔 같지 않은 콘돔을 기획한 것이다. 그 기발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 결과 남성들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콘돔의 구매나 휴대에 있어 자유로워졌다.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결과 콘돔에 대한 부끄러움과 거부감이 해소되었다는 답변이 74%를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다른 사회적인 부작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문제의식이나 기획 의도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사실 그동안의 콘돔은 기능성 위주로 발전해 왔다. 더 얇게 만들기 위한 노력 끝에 초박형이 나오고, 그것도 모자라 돌기형이나 향을 첨가한 딸기향 콘돔 등으로 진화했다. 제품 사용 경험에만 초점을 맞춘 기획이 주류였다. 하지만, 시크릿 콘돔 기획자의 문제의식은 남달랐다. 사용 경험 순간이 아니라 사전/사후 단계까지 사고의 폭을 확장해서 사용 경험 이전 단계에서 문제를 발견한데 그 특별함이 있다. 기획자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사고의 폭이 돋보이는 기획이다.
이렇게 사고의 폭을 확장해서 고객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도구로 고객여정지도라는 기법이 있다. 고객이 상품과 서비스를 경험하는 단계를 사전, 경험, 사후 단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화해서 고객이 느끼는 감정과 불편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세분화해서 고객을 관찰하고 분석해 보면 새로운 문제를 도출할 수 있고, 새로운 기획이 시작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흉터 치료제 [더마틱스울트라] 라는 제품도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빨간약, 후시딘, 마데카솔 등은 다친 곳에 바르는 상처 치료제다. ‘다쳤다’ 라는 사용자 경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더마틱스울트라는 상처 치료 이후에 상처가 흉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등장했다. 고객 경험 이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좋은 기획이다. 그러면서 당당히 이렇게 외친다.
‘흉터가 있는 삶은 어떨까요? 상처치료가 끝나면, 흉터치료 시작’고객의 경험은 단편적인 순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경험이 시작되기 전부터 경험 이후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흐름이다. ‘고객여정지도’와 같은 분석방법을 활용해서 사고의 폭을 확장한다면, 그동안 생각치도 못했던 부분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제 2의 시크릿00, 제 2의 0000 울트라도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