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을 읽고 떠오른 것들/저녁

by 김나윤

‘저녁’ 시를 읽으며 어릴 적부터 김장철마다 정읍의 외증조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정읍 집은 평범하고 아담한 시골집이지만, 마당은 엄청 넓었다. 덕분에 구경할 게 많았는데 마당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 옆에는 견종을 알 수 없지만 귀여운 개 ‘해피’가 사는 철창, 수탉과 암탉이 사는 철창이 있고, 국화가 예쁘게 활짝 피어있고, 잡동사니들을 넣어두는 창고 건물이 있다.
뒷마당에는 외증조할머니가 옛날에 가족들과 살았던 옛날 집이 있다. 지붕이 슬레이트인 걸 빼면 사극에 나올법한 집이었다. 꽤 오래된 건물치고 문짝도 멀쩡하고 문풍지도 구멍 나지 않았던 것 등 외관이 멀쩡해서 신기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나이가 어려서 딱히 할 게 없어서 작은 마루방에 들어가 TV를 보거나, 아빠와 함께 산책하러 자주 못 나갔을 해피를 데리고 정읍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딱히 볼 건 없었지만 키워본 적도 없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경험은 재밌고 즐거웠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외증조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김장은 계속되었다.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나는 외삼촌 할아버지가 배추 농사를 해서 수확한 것을 소금물에 절여둔 것을 이모할머니, 외할머니, 엄마, 이모들이 소 양념을 넣는 작업을 위해 계속 배추를 옮겨 날랐다. 몇 시간이 넘도록 배추에 소 양념을 넣는 과정 중에 배추에서 가장 맛있는 노란 잎을 소 양념에 찍어 먹기도 했다. 붉은 해가 잠자러 갈 때까지 일하니, 어느새 김장은 끝났다.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해서 온 가족이 일 년 치 먹을 김치를 만드니 뿌듯했다.
저녁이 되자 작은 마룻바닥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돼지 수육에 버무린 김치, 쌀밥 등을 먹었다. 오늘 열심히 일해서 만든 김치를 오늘 바로 고기와 함께 먹으니 맛있었다. 밥 먹으면서 작은 아날로그 TV로 뉴스를 보고, 겨울이라서 귤도 후식으로 먹었다.
밤이 되니 시골이라 어둠이 짙게 깔렸다. 서울 하늘에선 보이지 않던 별들이 정읍의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는 걸 보니 낭만적인 느낌이 들었고, 시골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협소한 마루에서 모두가 자야 하니 성별 상관없이 모두가 일렬로 잠을 청했지만, 난 안 자고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너무 불편한 데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잠을 잘 때 발길질을 해서 밤중에 옆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찼기 때문이다.
아침엔 한기와 수탉의 꼬끼오 소리에 깼다. 아침을 먹고 김장에 참여한 가족들과 참여하진 않았지만, 정읍 김치가 맛있다는 할머니에게 드릴 김치통을 챙긴 후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중학생이 된 후로 초등학생 때의 여유로운 삶도 끝났고, 더는 몇 시간씩 내려가는 것도 지쳐서 중1 때 올해가 마지막 김장이라고 말씀드렸다. 덕분에 다시는 김장하러 내려가는 일은 끝나서 아쉽지만 좋았다.
그런데, 1년 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나서 집 전체가 흔적도 없이 다 타버려서 더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몇 년 동안의 추억과 그곳에서 살았던 가족들의 추억까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니, 해가 일몰 하고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읍에서의 김장도, 돌아갈 집도 없어졌지만, 저녁이 끝나면 또 해가 뜨고 내일이 찾아오듯이 정읍에서의 몇 년간의 추억처럼, 다시 한번 인생에서의 뜻깊은 추억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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