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근로의 차이
노동과 미래 / 전태일 평전을 읽고 도전해서 써본 에세이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노동이란, 학생이란 신분에선 익숙하지도 않고 접해볼 기회도 별로 없는 먼 주제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노동 운동은 전태일의 분신 항거가 전부였으며, 언론에서 가끔씩 나오는 대중교통과 공장 노조 파업운동 밖에 알지 못했다.그러던 중 전태일 평전을 접하면서 노동과 노동조합 강의를 듣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한국 노동계를 상징하는 전태일은 아버지에게서 열심히 배운 재봉 기술로 하루 14시간 이상 고된 일을 하던 시다에서 빠른 속도로 미싱사까지 된 그는 어렴풋이나마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월급은 거의 평상 임금 정도에 불과한 것이 공장 주인의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열 두 세살의 어린 소녀들이 하루 14시간 이상을 겨우 70원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 환경 개선과 자본금 삼천만원이 있어야만 가능한 모범 업체 설립의 꿈을 세우고 노동운동 조직 창립과 노동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해왔다.
나도 중1 때 재봉질을 자유학기제 과목으로 선태해서 직접 원단을 재단하고 옷을 만든 경험이 있었다. 재봉을 하다가 선이 삐끗 나가기만 해도 실밥을 뜯고 다시 박아야하는 피곤한 작업이기 때문에 2시간 내내 앉으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재봉질 하는 것도 힘든데 하루 14시간 이상 옷을 만드는 여공들을 보니 안타깝고 업주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휴일도 없이 열악한 먼지구덩이 같은 공간에서 노동하는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태일은 열심히 노동계의 현실을 알리지만 근로 감독관과 다수의 공무원, 경찰은 그를 무시하고 방해하고 조롱했다. 수많은 재봉사와 사람들은 부질없는 짓이라며 무시해왔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은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만든 세상을 고발하기 위해 평범한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존재해봤자 지켜지지도 않는 근로기준법을 화형 시키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죽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으려고 했던 전태일의 말이 그가 죽기 전까지 외면과 조롱만을 받았던 이유는 아마 시장 노동현실의 불합리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노동조합이 아닌 노동자 개인 혼자서만 필사적으로 외롭게 싸워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는 노동이라는 말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노동자, 노동절이 근로자, 근로기준의 날의 의미보다 좋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헌법에 보장된 다양한 노동권을 보장받아 노동조합도 만들고 권리도 주장하는 주체다.
그러나 근로자는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존재'로 근로자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국가나 자본가가 시혜적으로 ‘열심히 일했으니 혜택을 주겠다.' 는 의미가 담겨있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혜택이 없을 수도 있다. 거의 조선시대 양반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쫓겨나거나 죽는 노비 급에 가깝다. 헌법상 노동권이 현실에서 쉽게 외면당하는 이유다.
한국이란 나라에서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죽은 직후에도 오늘날에도 학교에서 노동 운동을 교육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취업하기 전에 노동법을 위시한 산업재해, 산업안전 등을 알려주는 노동교육을 하는 학교는 많지 않다. 그러니 학생들은 업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기도 하고, 인식하더라도 하소연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과로에 시달리다가 의식불명 되는 사건이 허다하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망 사고, 2017년에 일어난 제주 음료수 공장 사망사고, 콜센터 실습생의 자살 등이 모두 노동교육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국가와 교육의 부실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학생들이 죽어간다는 건 매우 허무한 일이며, 나도 자칫하다가는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해외에서는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모의 노사교섭을 통해 노동자, 경영자 역할을 맡아보면서 교섭 수업을 하며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이 어떻게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지 설명해 보시오라는 활동지도 있다.
학교에서 왜 이렇게 불온한 내용을 배우냐고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많은 나라들에서는 노동자가 스스로의 권리를 깨우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오랜 노동운동의 역사를 통해 깨우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노동자는 육체를 쓰는 직업군이라는 오해와 현상 수배 전단에 ‘노동자풍’이라는 말이 흔히 나오는 것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노동절이라고 부르는 날을 우리만 유독 근로자의 날이라고 한다.
노동교육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다른 나라에서는 경찰, 소방관, 군인, 판사, 변호사 교장 등 직업군에 상관없이 모든 직업에 노조가 존재한다.
즉, 지위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잘못된 인식으로 ‘너 공부 안하면 저런 일 해야 돼’, ‘공장에서 미싱할래, 대학에서 미팅할래?’ 등의 부정적인 말들이 생겨났다.
한국은 노동자 간에도 정규직, 비정규직을 구분하며 임금, 휴게 공간, 휴식일 등에 차별을 하는 등 비정규직에 대한 심각성도 존재한다. 그렇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차별에 항의해 몸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하기도 하고 비정규직이 원인이라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도 다수 존재한다. 사실 비정규직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확대로 거꾸로 가는 노동개혁 때문에 좀처럼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파업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는다. 노조가 파업하는 것을 보면 월급을 인상하고 싶어 하는 인상노조라고 비난하고, 색깔론으로 덧씌우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 교육이 이루어지는 다른 나라에서는 상황이 다른데, 캐나다 밴쿠버에서 노조 파업으로 쓰레기 처리가 되지 않자 시민들은 쓰레기 청소 노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태를 일어나게 만든 시장 집 앞에 쓰레기를 버렸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면접관이 빌리의 아버지에게 “파업 승리하기 바랍니다”라는 인사말을 전했다. 현실에서 어느 선생이 학부모에게 파업을 승리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영화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에서는 파업으로 인한 대중교통 체중 불편을 호소하는 딸에게 어머니가 불쌍한 노동자들을 비난하지 말라며 “여기는 미국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 사회도 엄청날 정도로는 편협하지 않아서 미국 작가 조합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헐리우드 스타들이 골든글로브 집답으로 불참하기도 하고,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는 자신이 평범한 노동자였다면 노조에 가입했을 것이라며 본격 노조 광고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왜 유독 우리 한국 사회는 노동조합과 파업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걸까?’란 의문도 많이 생기는데 그 원인은 다른 나라와 다른 특별한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한국은 민주공화제와 자본주의 체제에 필요한 사회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생략되어버렸다.
프랑스 시민혁명처럼 평민이 민주적인 힘을 쟁취하는 것이 아닌 소수의 권력자가 이익을 독점하는 구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거의 볼 수 없는 지배 계급의 극우 보수적 정치 성향, 지나치게 낮은 인문학 수준, 노동운동에 대한 혐오감 등 세계에서 유일할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된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 만들어진 비정상적 현상들이다.
민족상간의 아픔인 분단도 이것에 한몫해서 지배 계급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쟁취를 북한과 연계시켜 불온한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렇게 사람들은 노동 운동에 대해 꺼림칙하게 여기게 된 것 같다. 나도 초등학생 시절 평화 시위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을 접해본 적이 없었고 항상 노조 운동이 벌어질 때면 빨간 색 띠를 두르고 ‘단결하라!’라는 메시지를 외치며 대치상황을 벌이던 것을 자주 봤기에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새로운 직장인들은 자신들 또한 노동자였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산업혁명 이후 300년 세월 동안 계속됐고, 지금도 계속되어 가는 중이다. 우리도 식민지, 분단, 군사 정부 때문에 노동운동과 노동자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한 세월이 늘어났던 것일 뿐이니 앞으로 고공농성, 단식 농성뿐만 아니라 더 많은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의 노동운동을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전태일 같은 노동운동가 몇 명의 노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듯이 사회적 관점에서 노동자, 고용주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노동자는 결국 미래의 나이자,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