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오 (錯誤)

지워진 인간

by 김가희


정확함을 흉내 내는 그의 한마디는 침침한 암흑 속으로 나를 끄집어 내렸다. 이건 오류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다. 순식간에 내려진 허상의 결론은 나를 지워버렸다. 나의 존재 위로 내려앉은 자비 없는 죽음의 손길.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은밀한 사형선고다.




나에게는 몇 가지 고유한 능력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자아의 착색을 배제할 수 있는 시선이다. 이 시선은 가장 먼저 나의 수치스러운 면면을 해부하고, 단면 위에 질서를 설계한다. 그렇게 구축된 구조는 현실 속에 실험적으로 투사되고, 다시 내면으로 회귀하여 흐름을 조정한다. 이 낯선 응시는 개인을 넘어 세계로 확장된다.


나는 나 자신을 한 겹의 색채처럼 다룬다. 때로는 그것을 걷어내어 투명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시 색을 입어 감각하고 흔들린다. 개성이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의 결과다. 중심에 자리한 고유한 능력이 서서히 펼쳐지고, 그 축을 따라 기술과 감각이 조합된다. 그렇게 형성된 정교한 질서는 곧 ‘나’라는 형식이자, 흉내 낼 수 없는 하나의 결이 된다.




누군가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저주할 때, 내 안에 잔존하던 사나운 분노는 불길이 되어 타오르곤 한다. 여기서의 부정은 행동의 논평이 아니다. 누군가를 벌하고자 하는 단정적이고 집요한 비명과 모욕을 의미한다.


인간은 죄를 지어 고통받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운 삶이 곧 죄라는 낙인을 부여하는가. 죄에는 방향이 없다. 그것이 나를 파괴로 이끄는지, 아니면 빚어내는지는 개인이 삶을 어떤 결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죄는 고통을 품고 있지 않다. 고통은, 죄를 끌어안을 때 생기는 서늘한 그늘일 뿐이다.


죄는 어디까지나 행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 생각, 마음은 본질적으로 변화 가능한 요소다. 물론 죄가 형성된 양상에 따라 개선의 속도는 극악무도한 차이를 보인다. 충동처럼 얕게 떠오른 죄는 직면만으로도 방향을 틀 수 있지만, 오래된 결핍이나 성향과 얽힌 죄는 완강히 외면해 왔던 자기 자신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 없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과정은 고귀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기존 자아의 영원한 상실은, 동일한 종류의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결국, 고통은 죄가 아닌 존재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타락한 종(種)이 아니라, 결핍을 품고 진화하는 생명이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숭고함으로 데려간다.




우주의 지배자가 빚어낸 특수한 능력은 변화가능성이 내포된 ‘본질적 결’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주어진 능력이다. 언어나 수리능력이 강하다는 범주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작동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쓰이는 방향에 따라 극도로 창조적일 수도, 파괴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마법의 중심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창조적인 모습을 띤다. 옆에 있는 평범함의 옷을 입은 그 사람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지나친다. 내가 줄곧 다양한 사람과의 교류를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결국 이것 때문이다. 신성한 능력에는 마땅한 찬미가 필요하다.


이 경외감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향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이기에, 타인을 인정하는 행위는 곧 나의 존재의 가치를 함께 높이는 일이 된다. 개인의 능력은 고유하기에, 결코 서로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 견고한 복잡성을 지닌 한 사람의 빛은 자신을 또렷하게 비춘다. 그러나 빛이 만든 그림자를 결함으로 착각하는 순간, 타인의 능력은 자기부정의 그림자 속에 뒤틀린 거울이 된다.




나는 진정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 대한 비방이 정말로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가? 인간과 죄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렇기에 죄를 앞세워 한 존재 전체를 짓밟으려는 움직임은, 결국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타인의 압도감에 대한 무의식적 복수이며,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투사적 파괴 충동이다.


진실이 흔들릴 때, 나는 나의 순수를 잃는다. 긍정성과 부정성은 언제까지나 유동적인 층에 위치한다. 가치평가가 투영된 반사면으로 어찌 빛나는 생명체를 부정하려 하는가. 고정적인 시선이야 말로 교묘한 죄악이다. 존재의 능력에 대한 비방은 결국 스스로의 존엄을 훼손시킨다.


내면의 모순과 결핍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에게, 외부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이 타인의 존재에 덮어씌운 죄는, 자기 내면의 공격성을 정당화시킬 명분일 뿐이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력감, 열등감, 무가치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게를 상대에게 이동시켜 날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괴는 언제나 궁핍한 이들이 택하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비판이 혐오에 사로잡혀 존엄을 시들게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자신만의 고통을 지나, 고유한 능력으로 이 세계를 살아내는 황홀한 별이다. 우리는 서로를 응시한다. 아니, 느낀다. 그 살아있음, 지나온 시간, 고유한 흔들림으로 영혼을 부드럽게 채운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사무치는 경이로움 앞에 세운다. 존재는 우열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충만함의 형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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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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