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結晶)

정지된 탄생

by 김가희

그런 날이 있다. 잠이 밀려들어 나의 하루를 덮치는 날. 눈을 뜨는 순간 우스꽝스러운 하루들이 삐걱거리는 날. 일상적인 움직임조차 기울어진 몽상처럼 느껴진다.


침몰하는 상황에서의 시간은 지나치게 느리게 흐른다. 목숨줄을 놓아버릴 수도, 어떠한 발버둥으로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설명은, 눈앞에 검은 색채를 뿌린다. 도대체 둔해져 버린 시곗바늘의 윤활유는 무엇인가.




감정의 무기력은 움직임에 멈춤을 가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짊어진 무게로 인해 팔다리가 묶여버린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의 정신은 침전을 택했다. 탁해졌던 물의 정화를 위해, 새로운 결심의 응고를 위해, 쌓여왔던 상당한 양의 감정과 상황의 정리를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는 자극이 흘러든다. 그것들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 내면에 집요한 흔적을 남긴다. 외부의 압력은 언제나 무한한 곱으로 늘어난다. 우람한 도시의 건물들처럼,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눈빛처럼, 해변에 흩뿌려진 모래알처럼. 우리는 그 무수한 감각의 충돌 속을 살아간다. 선택하지 않아도 따라오는 자극들, 그것이 삶을 점유한다.


이처럼 과도하게 밀려드는 감각은 자아의 경계를 무디게 하고, 마음속 질서를 조금씩 침식시킨다. 그 틈을 타 얽히고설킨 욕망이 스며들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운전대를 빼앗는다. 타락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미세한 자기 합리화와 무기력한 삶의 수용 속에서 비롯된다. 침묵은 곧 혼돈이 되고, 혼돈은 곧 자신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복잡스러운 정신으로 청결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공원에 누워, 그간의 시간들에 대해 떠올렸다. 무엇을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던가. 반복되었던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새롭게 마주한 감정은 무엇이었나. 왜 나의 삶은 이러한 사건들과 함께 가야만 했을까. 그 일련의 과정이 나에게 건넨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제, 나는 무엇을 정비해야만 새로운 출발선에 설 수 있을까.


나만의 경험을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새로운 상황 속,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나를 던지는 일은 언제나 유의미했다. 정비를 마친 자아를 시험하기 위해 곧장 집단 속에 투입시켰고, 눈에 띄는 마찰 없이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것이 곧 완성이라는 착각을 했다. 완벽하다는, 스스로를 속이는 오만한 안정감에 젖어 있던 것이다.


내 안에 숨겨진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주하면 통제할 수 없을까 봐, 차라리 감추고 지우려 했던 힘.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안에서 나를 밀어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모든 결을 숨김없이 드러내야 한다. 굴절된 없이, 방어 없이, 있는 그대로. 단단한 투명함으로.




고요는 복원을 위한 필연적인 절차다. 과부하를 차단하기 위해, 나는 잠시 회로를 내려놓는다. 겉으로는 멈춘 듯 보이지만, 안에서는 새로운 설계가 조용히 그려지고 있다. 멈춤은 영원한 정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투명도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이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우리는 더욱 또렷한 의도와 강도 높은 에너지로 다시 세상과 맞닿을 수 있다. 감정의 바닥을 딛고 일어선 통찰은, 어둠 속에서 굳어져 나온 결정(結晶)처럼 단단하고 맑다.


한 점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비워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낸다. 그간 나의 안에 겹겹이 쌓여왔던 잔존의 감정들, 깊숙이 침전된 축적의 산물을 하나씩 흘려보낸다. 채워 넣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떠남의 행위는 도피가 아닌 귀환이며, 비움은 소멸이 아닌 새로운 궤도를 그리기 위한 준비다. 진정한 탄생은 언제나 가장 깊은 공백에서 자라난다.


비워낸 자리에 밀쳐두었던 감정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감정의 무력은 단순한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언어이며, 존재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진동하는 내면의 지층이다. 우리는 종종 감정을 빠르게 해석하거나 덮어버리려 하지만, 그 속엔 오래된 결핍과 억눌린 진실, 여전히 살아 있는 욕망의 흔적들이 겹겹이 깃들어 있다. 지난 삶의 깊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러한 마주침은 단순한 심리적 인식이 아니다. 아주 미세한 자각 하나, 혹은 두려움을 무릅쓴 사소한 선택 하나가, 색다른 방향으로 현실을 움직인다. 무력감의 고해를 껴안는 자는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회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과거의 패턴을 이탈하여, 더 정직하고 투명한 흐름 속으로 나아간다. 변화는 거창한 결심이 아닌, 작지만 명확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부드럽지만 분명한 단절이며, 기적의 시작이다.


우리는 부활의 씨앗을 품어야 한다. 아직 피어나지 않았으나 이미 방향을 가진 상태, 고요하지만 생명력 있는 잠재태. 감정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낸 사람은 과거의 반복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깨어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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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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