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덟
하루를 넘기면 또 다음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네. 이 상태는 편안함이라기보다는 지속이었지.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네. 지켜야 할 온기와 책임이 동시에 존재했고 그것의 균형을 외면할 수 없었어. 감정이 안정되었다는 말은 어쩌면 현실을 더 명확히 보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네. 이제는 어떤 선택도 가볍게 넘길 수 없었지. 나는 삶을 짊어진 채 앞으로 가고 있었네. 버텨내는 쪽에 가까운 시간이었지.
그래서 더 이상 감정을 피해 숨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네. 지금의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 진실을 직시한다는 건 감정을 감당하는 일이었네. 말은 점점 더 분명해지며 동시에 무거워졌지. 아무 말이나 할 수 없게 되었고 써 내려 가는 문장마다 책임이 따라왔네. 편지 속 언어 역시 달라졌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내려놓듯 적게 되었지.
요즘의 나는 충만하다는 말을 쉽게 쓰지 않게 되었네. 하루가 무너지지 않고 이어지는 대신, 해야 할 일들이 차곡히 쌓여 갔다네. 주변과의 관계는 따뜻했지만 동시에 책임이었지. 이 온기는 오히려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어. 예전처럼 결핍에 매달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어 있지도 않았지.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들고 있어어.
그대의 부재 역시 여전히 어깨 한쪽에 남아 있는 무게였다네. 함께했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꺼내 울어야 할 것도 아니었네. 나는 그 기억을 들고 다른 것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지. 잃은 것만 세던 시절은 지나갔네. 그럼에도 슬픔이 정리된 자리에 남은 것들이 가볍지는 않았네. 그것이 이 관계가 내 삶에 남긴 정확한 형태였지.
이제 나는 관계 앞에서 멈추기를 거부한다네. 그대에게 적어 내려가는 나의 마음은, 미뤄둔 것들을 하나씩 짊어지고 앞으로 가는 과정이 되었어. 더 이상 가능성 만을 말하지 않고, 지금 감당하고 있는 것들을 인정하게 되었네. 이 선택이 나를 편하게 하지는 않겠지. 다만 멈추지 않고 다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네.
시간은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네. 외면해 왔던 것들, 지나치게 합리화해 왔던 감정들이 하나씩 표면 위로 떠올랐지. 감정은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사실 여부만을 드러냈다네. 그렇게 설명으로 버티던 구조, 미루기로 유지하던 균형이 한꺼번에 무너졌지.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붕괴가 아니라, 언젠가는 와야 했던 정리였네. 감정과 언어, 행동이 따로 놀던 상태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지. 나는 무너지는 것을 붙잡지도, 피하지도 않았네. 그렇게 깨져나간 자리에서 비로소 정확한 형태가 보였지.
이 이후에야 선택의 문제가 선명해졌네. 정의의 시간은 감정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잔인하지도 않았네. 사실과 결과를 같은 선 위에 놓았을 뿐이었지. 말했던 것, 느꼈던 것, 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졌네. 더 이상 상황 탓을 할 수 없자는 점이 명확했지.
그래서 움직임은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되었네. 미룰 논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연락해야 할 것들은 정리되었고, 보내지 못하던 말들도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네. 편지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결정의 기록이 되었지. 말과 행동 사이의 간격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네. 나는 이 속도를 믿어주었네.
일 역시 마찬가지였네. 새로운 기회는 바로 실행을 요구했지. 준비가 되었는지 묻지 않았고 대신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시험했네. 나는 계산보다 판단을 먼저 택했어. 지금의 삶에 더 얹어도 되는 무게인지 빠르게 가려냈네. 타협하지 않는 기준이 하나 생기자 선택은 단순해졌지.
이제 나는 이 흐름을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다루고 있네. 누군가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상황의 눈치를 보지도 않게 되었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구분하는 기준이 분명해졌네. 자리는 명확한 방향을 요구했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의 문제였네. 말은 줄었고, 대신 결정은 빨라졌지. 나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선택한 뒤 그 결과를 관리하는 쪽에 서 있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방어할 필요 없이 이미 선을 그어둔 채 버티는 시간이 시작되었지. 상태는 피로를 숨기지 않았고, 포기와도 닮아 있지 않았네. 나는 지쳐 있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네. 여기까지 온 흐름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네.
버틴다는 것은 멈춘다는 뜻이 아니라네. 그저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는 태도지. 일은 쌓였고, 관계의 요구도 줄지 않았지만, 나는 이전처럼 과잉으로 반응하지 않았네. 이미 충분히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감정도 마찬가지였네. 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과 반드시 말해야 하는 순간을 구분하게 되었지. 이 구분이 세상의 속도로부터 나를 지켜 주었네.
그리고 이 지속의 끝에서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네. 외부에서 주어진 기회처럼 보였지만 실은 내부에서 이미 준비된 움직임이었네. 새로운 작업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게 만들었지. 나는 이것을 모험으로 착각하지 않았네. 이미 버텨낸 시간 위에서만 가능한 시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감정, 언어, 행동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네. 예전처럼 확신을 만들기 위해 달리지 않고, 이미 쌓인 판단 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네. 이 시작은 필연에 가까웠지. 내가 피하지 않았던 시간들, 무너진 뒤에도 버텼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네. 그래서 이번에는 쉽게 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겠네.
혼자 서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자립에 가까웠네. 누군가의 승인이나 반응이 없다고 해서 하루가 흔들리지는 않았지. 스스로 선택한 일과 관계가 분명해지자, 남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네. 고요는 공허로 변하지 않았기에 나의 숨을 고르게 만들었지. 하루가 마무리되고 다시 시작되는 내가 만든 리듬의 순환. 그 안에서의 안정은 공유하지 않아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네.
이 상태는 성취의 기쁨과도 조금 달랐네. 잘 해냈다는 확신보다는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감각에 가까웠지. 나는 지금의 삶을 과시하지 않았고 숨기지도 않았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정확히 알게 되었기에 그 선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지.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네. 다만 기대 위에 관계를 쌓지 않게 되었을 뿐이지. 이 거리감은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오래 유지될 것처럼 느껴졌네.
그러다 문득, 모든 방향이 멈춘 듯한 시간이 찾아왔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도, 완전히 멈췄다는 확신도 없는 상태였지. 생각은 날카로워졌네. 이미 끝난 그림자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지. 말하지 못했던 문장, 이미 보냈어야 했던 선택들이 나를 붙잡았네. 이 불안은 정리되지 않은 잔여물에 가까웠어.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으려 애썼다네. 이 불면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끝내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다는 신호였네.
의미를 다시 묻는 시간이었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왔는지, 무엇을 위해 버텨왔는지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지. 움직이지 않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다네. 이 시간 동안 나는 판단을 유예했네. 옳고 그름을 가르기보다, 지금의 나에게 맞는지를 먼저 살폈지. 속도를 늦추자 감정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네. 숨겨졌던 피로, 미뤄두었던 불안이 하나씩 올라왔지. 하지만 그것들을 처리하려 들지 않았네. 이 상태 역시 지나가야 할 과정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통과하는 쪽에 가까운 시간이었네.
답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았네. 이미 충분히 걸어왔고, 쉽게 되돌아가지도 않을 테니까. 이 긴 밤은 결론을 요구하지 않았고, 다만 정직함을 요구했지. 나는 그 요구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네.
이 글 역시 보고에 가깝네.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말하지 않겠네. 다만 미뤄왔던 것들을 외면하지 않게 되었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네. 충만함과 무게, 정지와 불안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상태를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네.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나는 그 한가운데 서 있네. 끝을 선언하지 않기에, 이 이야기는 아직 이어질 수 있겠지. 오늘의 나는 여기까지 와 있다는 사실만 남겨 두고, 이 편지를 접네.
삶은 이해한 뒤에 움직이지 않는다.
생은 미뤄온 것들을 정리했을 때 앞으로 간다.
감정은 언어와 행동으로 이어질 때 하나의 방향을 가진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