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우리

오늘이라는 날씨 -22

by K기노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자 이미 아이의 두 눈은 몰려오는 졸음으로 가득 차 올랐다. 급기야 식탁 의자에 앉아 밥을 입안에 가득 문 채 머리를 아래위로 까딱까딱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햇빛을 받으면 머리를 까딱거리며 흔들어 대는 장난감 같기도 했다.

"지호야, 한 숟가락만 더 먹고 할미랑 들어가서 자자."

엄마는 지호를 깨워서 입 안에 음식을 씹어서 삼킬 수 있도록 달랬다. 그러자 아이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칭얼거렸고 엄마는 물이 담긴 물병의 빨대를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지호가 물을 다 마시고 입 안에 음식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엄마는 아이를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식탁에 앉아 그 사람과 나는 엄마가 차려준 음식을 마저 먹었다.

"커피 한잔 할래요?"

나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컵에 믹스커피를 하나 넣은 뒤 뜨거운 물을 가득 부었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을까.

티스푼으로 저으며 소용돌이치는 커피를 보면서도 그 사람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지호가 많이 피곤했나 봐요. 저렇게 금방 잠이 들 줄은 몰랐네요."

그 사람은 내가 타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러게요. 창윤 씨가 아이랑 이렇게 잘 놀아줄 줄은 몰랐어요. 저는 혼자 커서 그런지 누구를 챙기는 게 아직도 힘들어요."

그 사람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 사람도 나처럼 혼자였는데 나는 무엇을 공감받길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지호 잔다. 너희 덕분에 오늘은 밀린 집안일도 하고 낮잠도 잤구나. 그리고 벌써 지호가 저렇게 잠이 들어버리니 내가 오늘 밤은 편하겠어."

엄마가 우릴 보며 웃으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주아가 내일 저녁에 지호를 데리러 온다고 좀 전에 연락이 왔더구나."

"그거 잘됐네. 왜 섭섭해요?"

"아니, 섭섭하긴. 지 엄마한테 가야지."

아니라고 했지만 엄마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낯설었다. 낯선 표정, 낯선 목소리가 내 가슴속을 따끔거리며 영 거슬려 보기 싫었다.

그 사람과 나는 엄마의 집을 나와 잠깐 함께 걷기로 했다. 저녁에는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오늘따라 더 반갑게 느껴졌다. 가슴이 이제야 뚫리는 듯 시원했다.

"서은 씨가 어머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갑작스러운 그 사람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나는 엄마가 답답해서 싫었고 그래서 또 미웠다.

"매번 엄마한테 틱틱대고 짜증만 내는걸요. 오늘도 엄마가 나 때문에 당황해하는 거 보셨죠? 저는 그런 딸이에요. 엄마가 삶을 지탱해 나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도리어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삶이 단축될걸요."

나는 그 사람을 향해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왜 계속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창윤 씨가 절 많이 배려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조금 불편해요. 내 입장에서는 나쁠 게 하나도 없는 데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어요."

"서은 씨는 왜 내가 서은 씨를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집도 그렇고 지금 엄마에게 온 것도 그렇고, 모든 걸 저한테 맞춰주고 있잖아요."

"그게 배려인가요? 나는 한 번도 배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서은 씨를 불편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고 나는 그것을 지키고 있을 뿐이에요. 서은 씨는 그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저는 그만큼을 서은 씨에게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불편해하지 말아요. 그럼 제가 도리어 서은 씨에게 더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 해요."

그 사람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이 아니라면 또 아닌 게 될 수 있는 거니까. 마음에 걸렸던 것들도, 그 사람에게 해주고 싶었던 또 나만의 배려도 할 필요가 없다면 내 마음은 어떤 선택을 하고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할까.

겨울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온도도, 내 살에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도, 늦가을로 넘어가는 어린 가을 날씨의 풍경도 가장 알맞게, 적당한 태도로 나를 대해주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슬퍼지는 날이 올까 봐, 어린 가을의 날씨가 그리워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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