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흔적 -23
그 사람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굳이, 왜, 꼭 그렇게 해야만 하냐고 그건 또 무슨 알량한 자존심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나도 내 마음을.
진실이든 거짓이든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은 사실인데 그건 또 진실이 아니기에 나는 그 사람의 작은 배려가 내 삶 곳곳에 조용히 스며드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이미 받고 있는 것도 많은데 작은 것마저 그 사람의 흔적들로 남겨지는 게 두려웠다. 사실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주말이라 늦은 저녁이지만 아직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고 버스 안에서도 빈자리가 많지 않았다. 나는 뒷좌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여자 다리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굳이 창가 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평소 같았다면 그냥 서서 갔을 테지만 오늘은 지쳤고 마음도 고단했다.
엄마가 반찬을 싸가지고 가라고 했지만 거절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메었던 조그만 가방마저도 버거웠다. 가방을 무릎에 내려놓고 보니 가방 앞 조그만 주머니가 둥글게 볼록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지퍼를 열었더니 아까 지호가 내 손에 쥐어줬던 딸기맛 막대사탕이 들어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사탕 비닐을 벗겨서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것은 달콤한 딸기우유 향을 퍼트리며 입안을 달달하게 물들였다.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창밖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늦은 저녁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무심코 사탕을 와그작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컸던지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젊은 여자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버스 창가에 고스란히 비쳤다. 나는 여자 쪽을 바라보며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 여자가 읽고 있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순간 비밀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져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기듯 발을 내딛는 자리자리마다 따라다녔다. 무슨 일인지 바깥공기보다 더 춥게 느껴져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른 옷을 벗고 뜨겁다고 느껴질 만큼 따뜻한 물을 틀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적셔댔다. 아무리 따뜻한 물이 내 몸에 온기를 불어넣어도 이미 몸 전체를 잠식한 한기는 나를 벗어나려들지 않았다. 어지럽고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대충 머리카락을 말린 뒤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유난히 넓은 침대는 나를 포근히 감싸 안지 못했다. 나는 실내온도를 25도로 맞추고 이불까지 하나 더 겹쳐서 덮고 누웠다.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온기를 찾아가던 중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내 몸은 뜨거운 화염에 휩싸이며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급하게 체온계를 찾아 귀에 넣었더니 측정불가 error라는 문구가 나오며 빨간 불이 깜빡깜빡거렸다. 이대로 나는 재가 되는구나, 영영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구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화장대 서랍 안에 넣어둔 체온계를 꺼내 체온을 재어보았다.
그것은 고작 36.9도를 나타냈다.
몸에는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한기와 뜨거운 열기가 서로 충돌하며 내 안을 헤집어놓았다. 머리와 상체는 뜨거운데 심장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팔과 다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밤새 잠이 들다 깼다를 반복했다. 밤이 깊어지는지, 아침이 밝아오는지 알 겨를도 없었다. 그냥저냥 지새우며 얕은 잠에 뒤척이고 있을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액정화면에는 선명하게 수찬이라는 글자가 떠있었다.
"써언, 우리 오늘 커피 한잔 어때? 내가 그쪽으로 갈게."
"미안. 오늘은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써언, 무슨 일 있어? 설마.. 벌써 조카 생기는 것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갑작스러운 수찬의 말에 놀라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가끔씩 수찬의 예상치 못한 발언은 적잖이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뭐야? 설마, 너.. 창윤 씨랑 싸움이라도 한 거야?
"아니야. 수찬, 아니라고."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수찬이라고 해도 지금 내 모습을, 내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나를 꽁꽁 숨길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