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마지막 -24
사람의 마음이란 참 그렇다. 열병이라도 앓듯 죽을 것 같이 끙끙 대고 나서도 어느새 살아지고 무뎌지고 또 그 마음까지 숨길 수 있는 것을 보면. 이래서 사람이 동물보다 낫다는 걸까. 아니면 그래서 이성적이라는 걸까.
예전에 엄마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웠는데 엄마가 유난히 예뻐했다던 그 강아지를 외할아버지는 다른 집에 보내버렸다고 했었다. 그런데 활발하고 명랑하던 그 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더니 하늘나라로 가버렸다고. 엄마는 그 이후로 절대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다. 항상 외로웠던 나는 강아지 키우는 게 소원이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 강아지 말이야. 외할아버지가 데려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열두 살 내 생일에 시골에 있는 삼촌 아는 댁에까지 가서 데려왔던 강아지였지.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말이야. 막상 데려놓고 보니까 귀찮고 성가셨던 모양이야.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 예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털이 날린다, 똥을 아무 데나 싼다, 귀 아프게 짖어댄다,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나에게서 빼앗아 다른 집에 줘버리더라고."
"그 강아지는 왜 그렇게 금세 죽어버렸을까?"
"나랑 살 때는 밥도 많이 먹고 활발하던 아이가 그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리고는 죽었다고 데려갔던 사람이. 모르겠다.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그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나에게 이런 일은 불쑥불쑥 내 마음으로 찾아올 거란 것을 나는 예감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 속에서도 불현듯 아프고, 기대하고, 다시 현실을 자각하고, 또 일상을 살아가는 그런 것 말이다. 어쩌면 그런 것도 어느새 습관처럼 이해하고 나를 설득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의 일상은 내 마음속에 어떠한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나였고 예전의 삶과 달라진 게 없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원하던 것이었고 그 사람이 약속했던 나의 행복이었다.
그런데 나는.. 달라졌다.
마음은 허전했고 어떤 미세한 틈이 생겨 버렸다. 나는 불안했다. 그 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릴까 봐.
달력은 점점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아직 날씨는 가을의 청량함과 선선함을 내내 붙들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단풍과 노오란 은행잎마저 아직 그 자리를 버티며 지키고 있었다. 이제 올해 단풍을 볼 마지막 기회라며 연신 뉴스에서는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고 수찬 역시 주말을 기다리며 진우와 함께 단풍구경을 하러 갈 거라고 잔뜩 마음이 부풀어있었다.
"너는 창윤 씨랑 단풍구경 안 가? 지금 아니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해. 아쉽다. 가을이 너무 짧아서."
"그러게, 겨울이나 여름이 가을한테 시간을 조금씩 양보해 줬음 좋겠네. 잘 다녀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싫었다. 그것은 시원해서 싫었고 또 따뜻해서 싫었다. 하늘이 높고 화창한 날이 지속되는 것이 매번 못마땅했다. 너무 더워서 함께 하지 못한다고, 너무 추워서 나갈 수가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이번 주도 내내 화창할 예정이었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비 소식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어지는 날씨를 보아서는 일기예보를 믿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가을이라는 계절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점점 마지막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 사람과 결혼을 하기 전에 내 일상은 어땠을까. 요즘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별다를 게 없는 하루, 여전히 똑같은 하루를 여느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 나는 지금과 달랐던 것 같다.
책을 읽고 OTT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그 별것 없는 행위에도 내 삶은 꽉 찬 듯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허공을 떠다니고 드라마를 보며 맥주를 마시면서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그 미세한 틈이 주는 분란을 감당해 내기에는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다행히 수요일 오후가 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겨울이 오려는 듯 길가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언제 가을이 있었냐는 듯이 차갑고 강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