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우리

오늘 우리의 하루는 -21

by K기노

어느새 낯섦을 잊어버린 아이의 경계는 사라져 버렸다. 엄마가 밥을 먹자고, 맛있는 과자가 있다고 유혹하며 불러도 지호는 그 사람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 "

허탈함이 뒤섞인 음성을 내고서 엄마는 엉덩방아를 찧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래서 잘해줘 봐야 할미는 아무 소용없다. 그치?"

"애들이 다 그렇지, 원래 애들은 자기랑 잘 놀아주는 사람을 제일 좋아해요."

내 말에도 엄마는 미련이 남는 듯 과자를 손에 쥐고는 지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근데 나, 서운해 지려고 그러네. 엄마가 원래 이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엄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 안에는 젊었던 엄마는 온데간데없고 고단함 속에 갇혀버린 그늘진 얼굴만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 읽은 듯 느닷없이 자신의 손에 쥔 과자를 내 입에 쑥, 넣어주었다.

"창윤이 오해하겠네. 네가 어릴 때는 내가 정신없이 바빠서. 그리고 네 아빠 때문에."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거짓말. 마음이 없어서겠지."

나는 불쑥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아이의 재촉하는 투정만이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 말걸. 어색해질 걸 알면서도 내뱉어버린 내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어머님, 좀 쉬고 계시겠어요? 서은 씨와 지호 데리고 놀이터라도 다녀올까 해서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말고 지호를 안아 든 그 사람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럴래? 나도 우리 사위 덕분에 좀 쉴 수 있겠다."

엄마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외출복을 챙겼다.

나는 엄마에게서 등을 진 채 능숙하게 지호의 신발을 신겨 현관문을 나서는 그 사람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엄마만 이곳에 남겨 두고 우리는 밖으로 향했다.

"엄마에게 괜한 말을 했어요. 그것도 창윤 씨 앞에서."

"네, 어머님이 많이 당황하셨을 거예요."

마음속에 돌을 얹듯 꽉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그 사람이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 있었냐고. 별것도 아닌 일로 어릴 때 감정을 끄집어내는 꼴이라니. 원래 모녀사이는 이래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해해 줄까.

바깥 날씨는 선선하지만 동시에 따스했다. 여름의 따뜻한 기운을 등에 업고 가을바람은 자유롭게 나부끼며 펄럭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지호는 신이 났는지 그 사람의 품에서 떨어지려 애썼다. 버둥거리는 아이를 놓칠세라 그 사람의 두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알았다. 알았어."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놀이터를 향해 뛰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나도 천천히 뒤를 따라가다 화단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지호와 함께 시소를 타고 그네도 밀어주었다. 그리고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연신 아이와 마주 보며 웃어댔다. 조금 지겨워질 무렵 또래 아이들이 모여서 놀고 있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지호는 어느새 모르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이에게 한참 더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나에게로 와서 내 옆에 앉았다.

"정말 애들은 지치지 않는 무한 체력을 가진 것 같아요. 저런 에너지를 어머님 혼자 감당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러게요. 혼자서는 감당하지도 못하는 애를 보느라 전전긍긍했겠죠?"

어느새 내 말에는 또 날이 서 있었다. 순간 상황을 깨닫고 당황한 나를 보며 그 사람은 그냥 미소 지으며 웃어 보였다.

"창윤 씨 집에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계속 괜찮다고만 하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아뇨. 제가 서은 씨 불편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엄마도 서은 씨 귀찮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갑자기 단호해진 말투에 놀라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장난기 섞인 얼굴도 어느새 사라지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해버린 그 사람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져 한 뼘은 더 멀어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뭔가 자꾸만 하나씩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일부러 놓고 지나쳐 버린 것도 같고 그것만 빼놓고 미처 챙기지 못한 무언가 인 것도 같았다. 그냥 그랬다. 오늘 우리의 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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