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우리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 -20

by K기노

아이가 잠에서 깨길 기다리며 우리는 식탁에 앉아 엄마가 타준 믹스커피 한잔씩을 마셨다.

"창윤이는 엄마와 커피 취향이 비슷하네."

꼭 믹스커피 두 개를 뜯어 진하게 커피를 마셔야 하는 나와는 달리 그 사람은 커피 하나를 넣은 컵에 물을 가득 타서 연하게 마셨다. 커피 그게 뭐라고, 사소한 공통점만으로도 엄마는 행복해했다.

나는 두 사람만 식탁에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매번 거실이나 부엌에서만 잠깐 머물다 갔던 엄마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어수선해 보였던 이곳이 아이가 오고 난 뒤, 좀처럼 엄마집에서는 볼 수 없던 훈기란 것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듯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스무 평도 채 되지 않는 지금의 빌라로 이사를 왔다. 독립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내가 집을 나가고 엄마 혼자 살기에는, 그리 크지도 않던 그 집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나 역시 엄마가 산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추억도 없는 이곳이 편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오지도 않을 딸을 위해 방 하나쯤을 남겨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그냥 엄마집일 뿐이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아이의 장난감이 티브이 서랍장 옆과 창 커튼 밑에 놓여있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강박적으로 집을 정리하던 엄마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동차 장난감과 블록 몇 개를 집어 아이의 장난감이 모여있는 박스 안에 넣어두었다.

-이곳이 이렇게 볕이 예뻤나.

눈이 부시게 환한 햇살은 베란다 창문을 관통해 엄마의 거실을 온통 따스하게 물들였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니 내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엄마의 따뜻한 품이 마치 기시감처럼 떠올랐다. 이상했다. 기억에도 없지만 스치듯 지나가버린 찰나의 느낌이라는 것이.

나는 뒤를 돌아 부엌 식탁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커피 한 모금씩을 마시며 서로에게 집중하여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엄마와의 시간이었다.

아빠에게 가족은 항상 자신의 통제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엄마도 나도..

다만, 나는 교묘히 그에게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하지만 엄마는 애석하게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빠가 사고가 나서 스스로 우리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엄마에게 식탁이라는 자리는 끊임없는 지적질과 잔소리 속에서 체할 듯 밥을 욱여넣어야만 했고 대화라는 보기 좋은 허울 안에서 일방적인 폭언을 감당해야 했다.

나는 이상해서 웃음이 나왔다. 엄마의 집 안을 침범해 제 멋대로 기웃거리던 따스한 햇살이 어느새 엄마가 앉아있는 부엌 속 식탁에까지 스며드는 듯 환해 보였다.

엄마와 그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엄마!"

"지호 깼나 보다."

엄마를 찾으며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식탁에 앉아있던 엄마는 벌떡 일어나 아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작은 체구의 엄마에게는 다소 버거워 보이는 남자아이를 안아 들고 우리가 있는 거실로 나왔다.

"지호야, 인사해야지. 이모하고 이모부야."

아이는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곧 울음이 터져버릴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내 지 엄마만 찾더니 오늘은 너희들이 낯설다고 내 품에 파고드네."

엄마는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토닥거렸다.

"네가 지호야? 지호는 성이 뭐야?"

"이모가 지호한테 물어보네. 저는 배지호입니다. 해야지."

아이는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도 없이 남겨진 아이에게 낯섦이란 곧 공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잇, 나는 자신이 없네. 미안해요. 엄마."

나는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를 쉬게 해 주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봐주겠다고 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호야, 이모부랑 장난감 가지고 놀까? 내가 먼저 놀고 있을 테니까 같이 놀고 싶으면 이모부한테 오세요."

그 사람은 아이의 장난감이 담겨있는 박스에서 블록들을 하나둘씩 꺼내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동차가 되기도 했고 귀여운 동물 모양으로 변하기도 했다.

"음, 동물원을 한번 만들어볼까? 우리 지호는 어떤 동물을 좋아할까? 사자? 코끼리? 기린은 어때?"

그 사람은 울타리를 만들고 사자와 코끼리를 만들었다.

"나는 하마. 하마가 좋아."

아이가 엄마 품에 파묻은 얼굴을 천천히 들어서 드디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자 조심히 슬금슬금, 아이는 느린 걸음으로 동물원을 만들고 있는 그 사람에게로 향해 갔다.

"우리 사위는 아이하고도 잘 놀아주네."

엄마는 자신의 두 팔을 주무르며 흡족한 얼굴로 그 사람과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상했다. 우리에게는 전에 없던 풍경이 낯설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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