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억 -19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마치 급행열차를 탄 것처럼 하루에 몇 시간씩을 점프하는 마법을 부렸다. 지루할 것 같던 기다림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슬픔이나 가슴속의 공백도 그리 길게 가지 않는 것을 보면 나이 듦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마흔이나 그 이상이 되었을 때는 마치 일 년 중에 며칠쯤은 탈락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상상을 해보았다.
일주일 만에 그 사람과 만나서 엄마에게 가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새로운 환경과 미묘한 삶의 변화에 조금씩 적응하는 중이었다. 그 사람은 토요일 오전 열 시에 내가 지내고 있는 우리의 아파트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엄마집 앞에서 만나자는 말을 해보았지만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는 그 사람의 제안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고 그저 으레 치르는 하나의 관문에 불과했지만 일찍 자려고 누워서도 나는 늦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새벽까지 OTT 드라마나 예능을 챙겨보고 날이 밝아짐과 동시에 잠이 드는 평소의 생활패턴과 달라져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꽤 오랜 시간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분명 설렘은 아니었는데 왜 다시 마음이 공허해졌는지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 사람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나를 발견하자마자 긴 팔을 뻗어 손을 흔들었다. 작은 얼굴에서 보이는 장난스러운 미소에 그만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급히 올리다 만 손을 짧게 흔들며 그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어머님 선물을 좀 샀어요. 신혼여행은 못 갔지만 빈 손으로 뵙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네, 저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과 어색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 사소하지 못한 떨림을 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나란히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계약에는 어디에도 없던 소속감이라는 것이 가느다란 실에 묶여 우리를 지탱하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우리가 함께 탄 차는 엄마의 빌라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 사람은 능숙하게 주차를 한 뒤 엄마에게 줄 선물을 챙겼고 우리는 여느 신혼부부와 같은 모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엄마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도 되지만 어쩌면 나는 진짜 손님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세요? 서은이니?"
집 안에서는 들뜬 엄마의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네, 어머님."
나를 보고 찡긋 웃음을 보이며 그 사람이 먼저 대답했다.
유난히 반가워하는 엄마의 환대를 받으며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강박적으로 깔끔하고 별 것 없는 살림살이에 휑하던 엄마의 집 안 풍경이 무슨 일인지 급히 정리한 듯 깔끔하지 못하고 어수선했다.
"엄마, 집에 누구 있어요?"
나의 물음에 엄마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딸과 사위가 왔는데 이렇게 집이 어지러워서 어쩌니? 엄마가 일찍 음식을 준비하느라 집을 제대로 치우지 못했어."
그제야 엄마의 피곤한 기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엄마의 안방 안에서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말을 하다 말고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든 아이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미국에 사는 이모가 네 결혼식 때문에 들어왔지 않니? 그런데 주아가 지금 이혼 소송 중이라고 하더라. 좋은 잔치에 미안하다면서 일주일만 아이를 좀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니 어쩌겠니?"
"그럼 이 아이가 주아 언니의 아들이에요?"
아이가 깰라 조용히 말하던 엄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휴, 깊은 한숨이 나왔다. 엄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어깨를 두드린 후, 문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우리는 관례대로 엄마에게 큰 절을 하고 그 사람이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어머님, 출장 때문에 신혼여행도 못 가고 제대로 된 선물도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빠른 시일 내에 서은 씨와 의논해서 신혼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사위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내 성화에 급하게 식장을 잡느라 그런 거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엄마가 이토록 따뜻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매번 그 사람을 향한 엄마의 눈빛에는 어떠한 거짓도 담겨있지 않았다.
엄마는 주아 언니의 아들과 예상치 못한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우리를 위해 잔칫상을 방불케 하는 음식을 차렸고 나는 모처럼 엄마의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그동안 채우지 못한 욕구까지 충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아이를 어떻게 본다고 그래요?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말한다고 달라질 게 있니? 미안하다고 사정하는데 안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딱 일주일만 봐달라고 하는데 그때까지만 버텨보는 거지. 그런데 역시 남자아이라서 그런지 에너지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구나."
엄마의 언니는 이십 년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와는 왕래가 거의 없었다. 간간히 전화로 소식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년간 소식이 끊겼다가 내 결혼식 때문에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모는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표면적으로는.
"갑자기 주아언니는 왜 이혼을 한다는 거예요?"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애아빠가 바람을 폈다더라. 이런 때려죽일 놈. 저렇게 어린 아들을 놔두고 바람피우는 놈들은 다 천벌을 받아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부부가 살다 보면 다툴 수도 있고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지만 신의만 져버리지 않는다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거야."
엄마의 고단한 얼굴이 신경 쓰였다. 체력이 약해서 뭐든 잘 버텨내지 못하는 엄마가 다섯 살 된 남자아이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곳곳에 미처 치우지 못한 아이의 작은 장난감들이 눈에 띄었다. 쌕쌕거리던 아이의 숨소리가 왜 그렇게 거칠었는지, 엄마의 얼굴에 묻은 고단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볼게요. 엄마는 좀 쉬어요."
"서은이 네가? 에잇, 아서라. 애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함께 데리고 나가서 놀게요. 걱정 마시고 어머님은 좀 쉬고 계세요."
함께라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의 말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시간은 어떤 기억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