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우리

여전한 일상 -18

by K기노

우리의 하루는 그렇다. 밤의 허상을 지나 눈을 뜨면 곧 아침이 되어있는 것처럼 세상은 온전히 우주의 섭리대로만 반복될 뿐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마치 나에게는 천지개벽할 일일지라도 밤이 되고 나면 기어이 아침은 오고야 만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미쳐 날 뛴 돌을 잡고 우주 밖으로 던져보아도 그 돌이 떨어지는 곳은 내 반경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툭, 하고 떨어지고 만다. 결국 그 돌은 내가 아니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맞는 비극을 초래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잔꽃 무늬로 가득 채운 침실의 커튼 사이로 아침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가을비 치고는 꽤 많은 양이었다.

-신혼여행이라도 갔으면 어쩔 뻔했어.

베란다에서 온종일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내내 했던 혼잣말이었다. 아직은 어색한 침실, 익숙하지 않은 텅 빈 부엌, 새로운 창 밖 풍경까지. 견디고 참아내고 즐겨야 할 것이 있음에 내심 감사하며 폭풍의 시간 뒤에 오는 무료한 시간을 어찌어찌 흘려보낼 수 있었다.

나는 출근 준비를 하며 어제 사둔 식빵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어디에 챙겨두었는지 보이지 않는 우산 대신 야구 모자 위로 트레이닝복 후드를 푹 눌러쓰고 비 오는 늦은 오후, 집을 나서서 사 온 식빵이었다. 밀키트를 살까, 라면을 살까 하다가 토스트용 식빵과 500미리 우유 하나를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낯선 풍경 속에 비를 맞고 별 것 아닌 것을 사서 돌아오는 시시한 외출이었지만 결국은 익숙해질 풍경 전에 누리는 잠깐의 설렘이었다.

-비가 안 와서 다행이야.

아직 찾지 못한 우산이 필요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소소한 생각 따위를 할 수 있는 아침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오전 7시에 욕실을 나오며 시작되는 나의 하루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 하나, 예전에 살던 집보다 회사와 가까워진 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터전의 이점이었다.

"써언, 얼굴이 환하네. 역시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아야 예뻐지는 동물인가 봐."

매번 같은 루틴의 반복일 뿐인데, 오늘 만난 수찬은 마치 오랜 기간 헤어졌던 친구를 보는 것처럼 반가웠다.

"얼굴이 퉁퉁 부어서 출근 못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그건, 음.. .. 써언. 내가 좀 오버했지? 다 너 때문이야. 왜 날 울게 만드니?"

수찬의 툴툴대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그 사람의 말처럼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나 혼자 잠깐의 일탈을 마치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며칠 신혼여행 갔다 오는 셈 치고 쉬다가 오지. 뭘 그리 열일한다고 회사를 나오냐고. 주말에 결혼한 사람 맞어?"

"그 사람도 출장 가는 데 굳이 혼자 집에 있어서 뭐 하게. 괜히 며칠 쉰다고 삐적대다가 나왔다가는 그냥 쌓인 일더미에 파묻혀서 삶이 더 고달파진다고."

여전히 수찬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오늘 맥주 한잔 어때? 이제 막 험난한 길로 들어선 친구에게 맥주 내가 쏜다."


매주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팀 회의도, 거래처와 밀린 메일을 주고받는 일도, 지친 업무 중간에 마시는 씁쓸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마저도,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마치고 수찬과 나는 회사 앞 호프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자리에 우리는 마주 앉아서 과일 샐러드와 오징어와 땅콩 같은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서로 생맥주 한잔씩을 주문했다.

"결혼한 소감이 어때?"

"뭐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결혼을 했었나?"

"뭐야? 시시하게. 매일 혼자 지내다가 남편과 둘이 한 집에 살게 되었는데 정말 하나도 모른다고?"

수찬은 내 얼굴에 두 번째 손가락을 가져와서 엑스자를 그리며 말했다.

"거, 짓, 말."

나는 수찬의 말에 멈칫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에게는 진실이었지만 또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내심 수찬에게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참, 이상해. 서은이 네가 결혼을 했다는 게."

"왜? 난 결혼하면 안 되냐?"

"아니, 그게 아니라 뭐랄까. 내가 또 네 연애사를 다 알고 있잖아? 대학 때 한번, 졸업할 때 한번, 또.. 스물다섯이었나. 아무튼 말이야. 쉽게 누구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는 네가 이렇게 빨리 결혼을 할 줄이야. 나는 정말 믿어지지가 않더라니까. 너에게 말은 안 했지만 혹시 빚을 졌나, 계약 결혼은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정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 창윤 씨 보고는 다 풀렸지만."

수찬의 입에서 나온 계약 결혼이라는 말에 또 흠칫,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창윤 씨가 왜?"

"널 바라보는 눈빛이 사랑이었거든. 그건 정말 찐 사랑이었어."

수찬의 말에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신 맥주 한 모금은 여전히 달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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