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에 대한 통찰
깨달음의 시작
시골에서의 하루는 친구와 함께하지 않으면 끝도 없이 늘어졌다. 친구가 가족 여행이라도 떠난 날이면, 나는 집안에 갇혀 지루한 날을 보냈다. 심심함을 달래려 할아버지의 책장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책, 그것이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였다. 어린 나이에 그 두꺼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개미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세계는 신선하고도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사체 페로몬에 대한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개미는 죽으면 즉시 사체 페로몬을 내뿜고, 동료들은 망설임 없이 그 시신을 치운다. 개미 사회에서 죽음은 정해진 신호이자, 잔혹할 만큼 깔끔한 정리였다. 개미에게 죽음은 단지 처리되어야 할 정보이자 물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죽음과 동시에 무수한 흔적이 남고, 그 잔상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 되어 오랫동안 떠돈다. 물론 어떤 흔적은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연결고리로 남겨진 이들에게 따뜻한 기억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애착, 빚, 물건처럼 불필요하게 남겨진 흔적들은 고스란히 '대물림'되며 남은 이들을 아프게 만든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짜 죽음이란, 몸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남겨진 흔적이 지워질 때 비로소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이 통찰은 내 삶을 지배했던 세 가지 대물림을 더 또렷하게 직시하게 했다.
∞ 애착의 대물림
엄마가 남긴 빈자리는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에 깊은 왜곡을 남겼다. 사람을 믿는 법을 알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믿거나, 극단적으로 차단하며 버텼다. 어린 시절 형성되지 못한 애착은 어른이 되어서도 나를 맴도는 그림자 같았다.
∞ 빚의 대물림
아빠의 카드빚, 실체 없는 차에 대한 각종 체납세, 그리고 한정승인 절차까지. 살아남은 어린 내가 감당해야 할 정리의 몫은 컸고 무거웠다. 죽음 앞에서조차 돈 문제가 먼저 다가오는 냉혹한 현실은 빚이라는 대물림의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 물건의 대물림
죽음 이후 남겨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생전에 소중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 그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담긴 물건들이, 죽음 앞에서는 그저 버려야 할 짐일 뿐이었다. 유품을 통해 소유의 무상함을 절절히 확인하게 되었다.
이 대물림은 당시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내가 실제로 물려받은 것들이다. 이것들을 정리하며 나는 다짐했다.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
유행처럼 번지는 미니멀 라이프는 집을 비우고, 물건을 줄이고, 고급 가구 몇 개로 공간을 채우는 인테리어로 소비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미니멀은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의 미니멀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방식'이다.
나는 하루하루를 죽음을 준비하듯 살아간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거나 비관한다는 말이 아니다. 언젠가 내가 사라졌을 때, 남겨진 이들이 나의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지 않도록, 현재 주어진 삶을 더 책임감 있게 살겠다는 다짐이다. 죽음을 준비하듯 살면 현재에 더 신중한 선택을 하게 된다. 불필요한 말, 불필요한 관계,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만 곁에 두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내가 겪은 대물림의 고통을 끊어내고, 내 삶을 비워내는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