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분노의 그림자

by 은파

폭염이 서울의 심장부를 집어삼키는 아침이었다. 타오르는 아스팔트는 마치 지옥의 숨결처럼 공기를 일렁이게 했고, 도시 전체가 신기루 속에서 허덕이는 듯 보였다. 땀에 젖은 행인들은 빌딩 숲 사이를 헐떡이며 서둘러 걸어갔다. 그러나 그 혼잡한 거리 한복판에서, 한 여인의 고요한 발걸음이 눈에 띄었다.

정하린. 30대 초반의 날렵한 체구에 찰랑이는 긴 생머리를 한 그녀의 눈빛은 마치 독수리처럼 예리했다.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린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도 긴 소매 셔츠를 고집했다.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닌,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녀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축복인 동시에 저주 같은 능력이 있었다. 피부 온도만으로 상대방의 감정과 상태를 읽을 수 있는 것. 프로파일러로서 그 재능은 완벽했지만, 일상에서는 그녀를 끝없이 잠식하는 고통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의 체온이 그녀에게 밀려 들어왔다. 피곤함, 짜증, 불안, 초조함···. 다양한 감정들이 그녀에게 닥쳐올 때마다 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이 감정들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그때 그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윤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다.

"하린아, 지금 어디야?"

지우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사무실로 가는 중이야. 무슨 일 있어?"

"큰일 났어. 지금 바로 동대문 쪽으로 와. 새로운 사건이 터졌어."

하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 이번에는 어떤 사건인데?"

"연쇄 살인범···. 그자가 또 나타났어."

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서울을 공포에 몰아넣은 연쇄 살인 사건이 또 발생한 것이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전화를 끊은 하린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어떤 끔찍한 광경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동대문 근처의 한 좁은 골목. 경찰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노란색 POLICE LINE이 통행을 막고 있었다. 하린은 신분증을 보여주며 현장으로 들어갔다.

"정하린 프로파일러님, 잘 오셨습니다."

한 형사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하린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현장을 살폈다. 골목 안쪽, 쓰레기통 옆에 하얀 천으로 덮인 시체 주변에서 과학수사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피해자는 누구죠?"

하린이 물었다.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여성입니다. 신원은 아직 확인하고 있어요."

하린은 천천히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천을 들어 올리자,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피해자의 목에는 선명한 목 졸림의 흔적이 있었고,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크게 떠져 있었다.

그 순간, 하린은 무언가를 느꼈다. 시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 그리고 그 속에 깃든 공포와 고통. 하린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만의 능력이 발동되고 있었다.

"하린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린은 정신을 차렸다. 윤지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아?"

지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지금 상황이 어떤 것 같아?"

지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똑같아. 목을 조르고, 특정한 기호를 남겼어."

"기호라고?"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체 옆을 가리켰다. 하린은 그제야 바닥에 그려진 작은 표식을 발견했다. 둥근 원 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이전 사건들과 똑같은 표식이야."

지우가 말했다.

하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연쇄 살인범은 지난 3개월간 서울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다. 모든 피해자는 30대 초반의 여성이었고, 모두 목이 졸려 사망했다. 그리고 매번 기이한 표식을 남겼다.

"또 다른 특이 사항은?"

하린이 물었다.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없어. 하지만 네가 와줘서 다행이야."

하린은 다시 시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능력은 때로는 저주 같았지만, 지금 같은 순간에는 특히 필요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시체에 집중했다.

그때였다.

"뭐 하는 거지?"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린과 지우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30대 초반,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하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하린이 물었다.

"이민준 형사입니다,"

그가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이 사건의 담당 형사죠."

하린은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민준에게서 어떤 체온도,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그가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는 정하린 프로파일러입니다."

하린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민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묻어있었다. 하린은 그의 태도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곧 표정 관리를 했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 피해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어요."

민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시체를 만지지도 않고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뭔가를 알 수 있다는 겁니까?"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민준 형사님,"

지우가 나서서 말했다.

"정하린 씨의 능력은 이미 여러 차례 입증됐어요. 그녀의 도움으로 이미 많은 사건을 해결했다고요."

민준은 지우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 능력을 보여주시죠. 피해자에 대해 뭘 알아냈습니까?"

하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다시 시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집중했다.

"피해자는···. 죽기 직전까지 극도의 공포를 느꼈어요,"

하린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살인자를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아요.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친숙한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느껴져요."

하린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살인자는 매우 차가웠어요. 감정이 없었어요. 마치···."

그녀는 말을 멈추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마치 뭡니까?"

민준이 재촉했다.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중요한 건 살인자가 피해자를 잘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살인은 우발적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것 같아요."

민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흥미롭군요,"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겠죠? 그저 당신의 '느낌'일 뿐이니까요."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능력으로 얻은 정보는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수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증거를 찾는 것은 형사님의 몫이겠죠,"

하린이 말했다.

"저는 단지 단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민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군요. 그럼, 앞으로 어떤 '단서'들을 더 제공해 주실 수 있을지 기대하겠습니다."

그의 말에는 여전히 비아냥거림이 묻어있었다. 하린은 그의 태도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더 이상의 말다툼은 피하고 싶었다.

"현장 감식은 언제 끝날까요?"

하린이 물었다.

"한 시간 정도 더 걸릴 겁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그동안 주변을 좀 살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혹시 당신의 그 '특별한 능력'으로 뭔가를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린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우와 함께 현장을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 형사 정말 짜증 난다,"

지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무례해."

하린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능력을 믿기 어려운 건 당연하잖아.“

지우가 심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너무하잖아. 넌 항상 이렇게 참아주기만 하고."

하린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지우야.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자."

두 사람은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하린은 주변의 건물들, 쓰레기통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아내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

지우가 물었다.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잠깐,"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골목 끝에 있는 작은 벽에 고정되었다.

"저기···. 뭔가 있어."

두 사람은 빠르게 그 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벽에 희미하게 그려진 표식이 보였다. 둥근 원 안에 십자가. 시체 옆에 있던 것과 똑같은 표식이 보였다.

"이건···."

지우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똑같아,"

하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좀 오래된 것 같아. 아마도 며칠 전에 그려진 듯해."

하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표식을 만졌다.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차가움과 동시에 강렬한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이 그녀를 덮쳤다.

"하린아, 괜찮아?"

지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런데 이건···. 중요한 단서야."

"뭘 느꼈어?"

"이 표식을 그린 사람···. 그는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동시에 차가워. 마치 얼음 속에 갇힌 불꽃 같아."

지우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야?"

하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이 살인범은 복수를 위해 살인을 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의 감정은 얼어붙어 있어. 그래서 차갑게,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거야."

"복수라고?"

지우가 물었다.

"그럼, 피해자들은 모두 살인범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개연성이 높아. 우리가 놓친 연결고리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자, 이민준이 서 있었다.

"뭘 발견했습니까?"

그가 차갑게 물었다.

하린은 잠시 망설였다. 민준에게 이 발견을 알려야 할지 고민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여기 표식이 있어요. 시체 옆에 있던 것과 같은 거예요."

민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빠르게 다가와 표식을 살폈다.

"언제 발견했습니까?"

"방금이요,"

하린이 대답했다.

"며칠 전에 그려진 것 같아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수사팀을 부르겠습니다. 이건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무전기를 꺼내 과학수사팀을 호출했다. 그리고 다시 하린을 바라보았다.

"또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요?"

하린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가 느낀 것을 말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하지만 그 정보가 수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네. 있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 살인범···. 그는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차가워요. 마치 감정이 얼어붙은 것처럼요."

민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복수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제가 느낀 거예요,"

하린이 대답했다.

"이 표식에서 강한 분노와 슬픔이 느껴져요. 하지만 동시에 차가움도 있어요."

민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흥미로운 이론이군요,"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증거는 없겠죠."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 그렇죠. 하지만 이 정보가 수사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민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참고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모든 발견 사항을 즉시 보고해 주세요. 혼자서 판단하지 마시고요."

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형사님."

그때 과학수사팀이 도착했다. 그들은 즉시 표식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린은 잠시 현장을 지켜보다가 지우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돌아가자.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아."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현장을 떠났다. 걸어가는 동안 하린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번 사건, 그리고 살인범에 대해 많은 의문이 들었다. 왜 그는 살인을 저지르는 걸까? 누구에 대한 복수일까? 그리고 왜 그의 감정은 그토록 차가운 걸까?

그리고 또 하나, 이민준이라는 형사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왜 그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는 정말로 감정이 없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하린의 능력이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걸까?

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끔찍한 살인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하린아,"

지우가 그녀의 생각을 깨웠다.

"너무 무리하지 마. 이번 사건, 쉽지 않을 거야."

하린은 미소 지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해내야만 해.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앞에는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이 도시를 공포에 몰아넣은 살인마를 반드시 검거하자고 굳게 약속했다.

하늘에는 어느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어둠을 예고하는 듯. 하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살인범을 찾아내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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